한쪽가슴으로 사랑하기 1020

222, 왠지 일기쓰고 반성해야 할 것 같은 날이다

내가 최선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닐 때가 있다. 나 스스로는 잘 한다고 한 것인데 지나고 보면 별 것 아닌 걸 가지고 내가 폼 잡은 거라는 걸 알게 된다. 최선을 다하기 위해 너무 많은 애를 썼는데 지나고 보면 심지어 잘못된/잘못한 일일 때도 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는게 두렵다. 누가 봐도, 어느 때 봐도, 흠 안잡히는 방향으로 최소한만 하고 사는게 어떨까? 가늘고 길게 저공비행을 하면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 그리고 힘을 분출해야 할 때 응집력을 낼 수 있다. 그래서 평소에 매일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삶이 효율적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아쉬울 때만 누나라고, 더 아쉬울 땐 엄마라고 날 불러도 밉지 않은 레지던트 동기랑 어제 통화를 하는데, 그는 내가 변한 것 같다며 새삼..

나 너무 좋아한 걸까?

진료실 들어서는 그녀 얼굴 표정이 환하다. 몇개월 전 마음의 고통이 온데 간데 없어 보인다. 이번에 찍은 사진 결과도 좋다. 뼈전이가 있기는 하지만 병변이 별로 넓지 않고 안정적으로 유지되기를 몇년째. 안색이 좋으시네요. 피부도 좋아졌어요. ㅎㅎ 나의 추임새 한방에 그녀가 입을 연다. 우리 딸이 이번에 한림대 의대 갔어요. 그녀가 겪었던 지난 몇개월 간의 마음의 고통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하나뿐인 그녀의 딸이 대학입학, 그것도 의대에 갔다는 사실에 너무나 기뻤다. 의대라서 그런거냐 속물적이라 비난해도 나는 너무 기뻤다. 거봐요. 그때 괜히 고민한거 였잖아요. 할 놈은 다 해요. 부모가 필요없어요. 괜한 잔소리에 불과한 거에요. 그러게요. 지가 다 알아서 하고 있었나봐요. 학원도 별로 못 보내줬는데... ..

미나리와 계란

환경 오염이 덜 된 유기농 음식, 깨끗하게 준비한 음식, 정성껏 만든 음식. 아줌마 환자들이 자신을 위해 일상적으로 노력하는 것들이다. 당신이 먹어보니 맛도 깔끔하고 염분도 낮은 것 같다며 소금을 사다 주기도 하고 동네 뒷산에서 주었다며 밤을 쪄다 주시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맛있는 밤은 처음이라고 하니 옆집 창고까지 뒤져서 밤을 더 삶아다 주신다. 당신 집에서 키우는 닭이 낳은 거라며 꾸러미 달걀을 갖다 주신다. 세줄 삽십알. 마트에서 파는 그런 달걀보다 훨씬 속이 알차고 튼실하다. 멀리 대구 사시는 분, 미나리 한박스를 손수 가지고 오신다. 벌써 세번째다. 뇌전이 방사선 치료 이후 걸음걸이가 아직 완천치 않은데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게 이 무거운 짐을 가지고 서울 오는 기차를 타신다. 내가 마음으로 늘 ..

환자를 볼 때는 촉이 살아있어야 한다. 객관적인 근거와 검사 결과를 잘 유추하여 결론을 내리고 치료방향을 정할 수도 있지만 객관적인 근거가 없어도 뭔가 감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단 이틀만에 환자가 중환자실에 갔다. 웬만한 폐렴도 하루 2번 엑스레이를 찍을 필요가 없다. 심지어 매일 찍는 것 조차 오바다. 웬만한 폐렴에서 CT를 찍는 것은 더욱 심한 오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어제 밤, 오늘 아침, 오늘 오후 연달아 엑스레이를 찍었다. CT도 찍었다. 환자는 정작 호흡기 증상을 별로 호소하지 않는다. 임상적으로는 안정적이다. 그런데 산소포화도를 체크해보니 90% 밖에 안된다. 산소 6 liter를 하고도 산소포화도는 오르지 않는다. 별로 힘들지 않다며 어리둥절해 하는 환자를 중환자실로 보냈다. 그리..

내 맘 편할라고요

42kg 156cm 몸집도 조막만하다. 얼굴도 조막만하다. 항암치료를 처음 시작할 때는 얼굴도 거칠었는데 요즘 보니 영 피부도 좋아졌다. 얼굴이 참 맑은 사람이다. 처음 유방암 진단을 받을 무렵 척추 전이가 너무 심해서 허리를 제대로 굽히지도 못했다. 많이 아팠다. 진통제를 주면 다 토했다. 나는 많이 걷지도 말라고 했다. 신경을 누르기 직전이라 방사선 치료부터 했다. 방사선 치료를 하면서도 너무 힘들어 했다. 넓적뼈이긴 해도 몇마디 포함 안되었는데 환자가 5번 치료받고 기진맥진 상태가 되었다. 방사선 치료조차 너무 힘들게 받은 환자. 유방암 치료는 안하기로 하고 집으로 가셨다. 기차타고 세시간. 저 멀리 경상도 사신다. 나이는 36세. 6살난 아들이 있다. 나에게 갖가지 경고성 협박을 다 듣고도 환자는..

의미있는 연구란...

표준지침이라는 것, 가이드라인이라는 것이 치료의 전부는 아니지만 최소한의 기준은 되기 때문에 그 원칙을 잘 알고 있어야 하고 최대한 그 원칙을 지키는 치료를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모든 환자에서 그 원칙을 지키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때론 모험적으로 치료 전략을 세우기도 하고 때론 근거가 좀 약해도 새로운 약을 시도해 보기도 합니다. 저는 아직 경험도 미흡하고 실력도 짧이 매번 시도가 성공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하는 것만으로 저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도 없습니다.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사람이니, 실수가 용납되기 어렵습니다. 최선을 다해 실수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저의 진료와 치료지침에도 한계가 있고 저도 잘못을 합니다. 다른 어떤 환자들보다 우리 유방암 클리닉 환자들, 그리고 저에..

언제 나쁜 소식을 전해야 할까

각종 치료 가이드라인에서 전이성 유방암 환자의 치료를 언제 그만 둘 것이냐에 대해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의견은 세가지 각기 다른 용법으로 치료했으나 연속적으로 반응이 없을 때이다. 그렇게 약제 반응이 좋지 않을 때는 추가적인 치료를 해도 약제의 반응을 기대하기보다는 독성에 의한 환자의 손해가 더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생존기간을 연장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고 환자 삶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더 이상의 치료는 권고하지 않고 있다. 약제 반응율은 치료 초반기 일수록 좋기 때문이다. 치료 후반기로 갈수록 약제에 감수성이 높은 세포보다는 저항적인 세포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런 원칙을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환자의 컨디션이 너무 좋을 때 치료 독성이 심하지 않을 때..

고생 많았어요

아침 회진 시간, 전공의와 대화 ** 씨는 혈압, 맥박, 호흡수가 어떠어떠한 상태입니다. 의식은 명료하지 못한 상태이고, 진통제 및 승압제는 같은 용량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직 안 돌아가셨어요? 네... 어제 호흡 양상 봐서는 금방 돌아가실 거 같았는데... 네. 잘 견디시는 것 같습니다. 빨리 돌아가셔야 할텐데... 누가 들으면 깜짝 놀랄 대화이다. 환자를 두고 빨리 돌아가셔야 할텐데 의사가 그런 얘기를 하다니... 그러나 환자가 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게 솔직한 나의 마음이었다. 환자는 나보다 한참 어린 젊은 남자. 아주 천천히 자라는 육종을 진단받았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5년전. 치프 레지던트로 일할 때이다. 너무 잘 생겨서 같이 치프 레지던트로 일하던 홍양과 나는 그의 팬이 되..

힐링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힐링 담론이 유행입니다. 다들 사는게 힘들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환자들 역시 몸도 몸이지만 마음이 더 힘듭니다. 저도 마음을 치유하고 싶어 시중에 나와있는 수많은 힐링 관련 서적들을 읽었습니다. 너무 많이 읽어서 질렸습니다. 이제는 더 읽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만 읽으려구요. 힐링은 그런 책과 지식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것 같습니다. 영어로 다음과 같은 개념들을 이 정도로 번역하면 될까요? cure ---> 완치 care ---> 돌봄 healing --> 치유 현대의 많은 병은 완치되기 어렵습니다. 또 완치가 된다 하더라도 치료 중 얻게 되는 합병증이 있기 때문에 몸이 100% 정상이 아닙니다. 치료가 끝났다고 하지만 여전히 힘들고 나에게 부족한 것들을 채워 넣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좋은 소식 전하기

미리 외래를 준비하면서 내일 환자를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지 알게 됩니다. 좋은 소식 나쁜 소식 검사 결과에 따라 달라집니다. 명절인데도 슬픈 마음, 우울한 마음으로 검사 결과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환자도 있습니다. 결과가 나쁘지 않으면 연락을 드립니다. 걱정말고 명절 잘 보내시라고. 좋은 소식만 전할 수 없는게 저의 운명이니 그렇게 누구에게만 미리 연락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의사로서 일관성이 없으니까요. 저는 좋은 소식보다 나쁜 소식을 전할 때가 더 많습니다. 나쁜 소식을 미리 전화해서 알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좋은 소식은 미리 알려주고 싶습니다. 일관성이 없는 거죠. 사람 마음이 인지상정이라 연락을 드렸습니다. 티끌같은 작은 사람 마음 그 한점을 얻지 못하면 세상 그 무엇이 의미있겠습니까. 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