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가슴으로 사랑하기 1020

엄마의 일기장

기도했건만 온 가족이 노력했건만 엄마는 힘겹게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돌아가셨다. 아직 많이 늙지 않은 엄마. 아직 많이 크지 않은 동생. 아직 어른이 될 준비가 부족한 나. 인생의 모든 것을 완전히 누리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를 미쳐 하지 못한 상태에서 엄마는 돌아가시고 자식들은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가지고 어색하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3월 새학기를 맞이하기 전에 시간맞춰서 돌아가신 것 같다. 3월부터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는 엄마의 당부이실까? 엄마의 일기장을 통해 엄마 생애의 마지막 심정을 유추해 본다. 끝까지 자식걱정 진로를 정하지 못한 고등학생 딸과의 실갱이 몸이 좀 나아지만 뭘 해봐야겠다는 결심 그리고 일기장 한 구석에는 몸을 좀 추스리게 되면 나를 만나고 싶다며 내 이름 석자를 적어놓으셨..

잡다한 증상 중에 중요한 증상을 놓치지 않기를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들에게는 온갖 문제가 발생한다. 환자를 괴롭히는 문제는병 때문이기도 하고내가 처방한 항암제 때문이기도 하고수술의 후유증 때문이기도 하고암과는 완전히 무관한 다른 문제 때문이기도 하다. 젤로다 때문에 발톱이 살속을 파고 들어가기도 하고이레사를 먹고 여드름이 나기도 하고진통제를 먹고 소변이 잘 안나오기도 한다.탁소텔 때문에 피부발진이 생기고 간지러움증이 심하기도 하고이리노테칸을 맞고 설사를 하기도 한다. 뼈 병변의 악화로 인해 고칼슘 혈증이 생기고 그것때문에 의식이 몽롱해지기도 하고방사선 치료 후 발생한 뇌 부종으로 인해 의식이 몽롱해지기도 한다. 내가 준 약 때문에 손이 떨리고 또 손떨리는 증상을 완화시키기 위해 준 약 때문에 제대로 못 걷고 휘청거리기도 한다.병이 좋아졌는지 나빠졌는지..

몸무게가 늘지 않는 할머니

한달 사이에 몸무게가 8kg 이나 줄었다.재발한 유방암이 표준 치료에 별로 반응하지 않고 나빠지기만 할 때도 할머니는 몸무게가 줄지 않았었다.벌겋게 부은 유방에서 진물이 나서 꽤 오랜 기간 방사선 치료를 할 때도 할머니 컨디션은 좋았다.몇가지 표준 치료 약제의 실패 이후, 임상연구로 치료를 시작한지 8개월, 처음으로 할머니 병이 좋아지고 있는 참이다.CT 상으로 보이는 병은 많아 좋아졌다. 객관적인 지표상 드물게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최근 몸무게가 급격히 감소하였다.70이 다 된 노인이 한달 사이에 몸무게가 8kg 이나 빠지니 당연히 기운이 없다.기운이 없으니 기분도 울적하다.병이 나빠지고 유방에서 진물이 흘러 매일 옷을 적셔도 우울해하지 않고 열심히 치료받던 할머니가 요즘은 치료의 의욕도 ..

그녀의 힘

허리가 아파서 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병원에 왔다. 유방암간, 폐, 전신 뼈, 골수, 림프절 전이 이런 무시무시한 병들이 그녀의 진단명이 되었다. 척추 전이 때문에 그렇게 아프고 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항암치료에 앞서 통증 조절을 위해 방사선치료를 먼저 해야 했다. 이미 골절이 온 부위, 곧 골절이 되어 신경을 누를 것 같은 부위, 급한 대로 그런 부위에 방사선 치료를 시작했다. 피검사를 하면 남들 백혈구, 적혈수, 혈소판의 반도 안되는 수치였다. 항암치료를 하면 대개 이런 조혈기능을 하는 세포들이 파괴되어 수치가 떨어지게 되는데 그녀는 지금보다 더 떨어지면 아주 위험한 상황이 초래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골수에 병이 있는 한 그런 수치들은 절대 좋아질 수 없다.척추에 방사선 치료를 받은지 얼마 되..

그만하면 살만한 거에요

유방암 수술 후 항암치료가 끝나고 방사선치료도 끝난 지 2년이 넘었다. 지금은 항호르몬제를 드시면서 6개월에 한번씩 정기 검진만 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사실 그녀는 이제 종양내과 환자가 아니다. 그녀는 오른쪽 폐 아래 쪽에 기관지 확장증이 있다.그래서 감기 등 호흡기 질환이 찾아 오면 가래에 피도 섞여 나오고 숨이 차고 호흡이 편치 않다.처음 그녀의 가슴 엑스레이를 보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정상 폐사진과 비교해서 보면 상당히 나쁘다. 빨리 CT라도 찍어서 속 안을 좀 들여다 봐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드는 사진이다. 그녀는 유방암 치료를 다 마치고 저 멀리 남쪽, 당신 고향으로 내려가셨는데별로 심각하지 않은 증상이 생겨도 환자는 항상 화들짝 놀라하며 서울행이다. 그 먼 곳에서 걸핏하면 응급실..

환자가 경험하는 질병 세계를 이해하기

의사는 객관적인 지표에 의해 환자의 병 상태를 진단하고 평가한다.환자는 주관적인 경험으로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고 경험한다. 객관적인 상황과 주관적인 상황이 잘 들어맞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의사가 보기에는 특별한 문제가 아닌데환자는 아주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의사가 보기에 별거 아닌거 같은데 환자가 이것저것 힘들어하고 불편해 하면의사는 자신의 인식체계 내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경우 또한 심기가 불편해 진다.그것이 의사와 환자 사이의 거리를 멀어지게 하고 이들간 의사소통이 원할하지 않게 되는 원인이 된다.때론 의사의 부주의와 무관심 때문일 수도 있고때론 환자의 과민한 반응과 과도한 걱정 때문일 수도 있다. 환자가 경험하는 질병의 세계는의사의 인식체계와 언어로는 이해할 수 ..

암생존자의 후기합병증 관리

암 생존자의 후기 합병증 관리 2012년 12월에 발표된 국가암등록 통계자료에 의하면 2010년 현재 한국의 암생존자가 100만명을 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암 생존자 그룹이 증가하고 이들의 수명이 증가함에 따라 암 치료 후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과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암 치료 중 발생한 부작용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을 장기적 합병증(long term effects) 이라고 한다면, 치료 기간에는 발생하지 않았으나 치료가 끝난 후 새롭게 발생한 증상을 후기 합병증 (late effects)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1) 후기 합병증은 암 치료를 위해 받았던 항암치료, 방사선치료, 수술 등과 관련하여 사람마다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날 수 있다. 신체적 심리적 합병증도 다르게 표현된다. 암 ..

아흔이 넘은 우리 엄마도 정정하신데

전이성 유방암을 진단받으신 62세 여자 환자. 최초 항암치료에 반응이 아주 좋았는데 어느 순간 저항성이 생겼는지 다시 유방의 혹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원칙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전이성 유방암임에도 불구하고 유방에 대한 수술을 하셨다. 여전히 뼈에 병이 남아있지만 그만그만하게 병이 잘 조절되고 있다. 그렇게 지내신지 어언 1년이 지나가고 있다. 이 사람이 너무 무리하는 거 같아요. 함께 외래에 다니시는 남편이 걱정어린 한마디 말씀을 하신다. 제가 암환자인지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아요. 그게 좋은 거에요. 계속 그렇게 사세요. 근데 혈당이 좀 높은 거 같아요. 혈당 조절 잘 하시는게 좋아요. 우리 병을 조절하는 데에도 혈당조절이 중요해요. 요즘 들어 소화가 잘 안되는거 같아요. 아흔이 넘은 우리 엄마보다 소화..

상호적인 마음

내가 누군가를 불편해 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는 단박에 그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겉으로 안그런 척 해도 금방 알아 차립니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는 은연중에 그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겉으로 표시내지 않아도 그 마음을 알아 줍니다. 상대방에 대한 나의 마음은 어느샌가 그 사람을 향한 나의 태도로 표시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너 예뻐보인다, 좋은 일있니? 사랑에 빠진거야?' 그런 말을 들은 적이 한번 있습니다. 그건 (결혼할 무렵이 아니라) (의대 다니기 전) 대학교 4학년 때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 였습니다. 철부지 고등학생 녀석들이랑 정말 친하게 지냈죠. 그 녀석들은 정말 시도때도 없이 '교생선생님, 사랑해요. 선생님, 너무 좋아요' 그런 말을 저에게 해 주었습니다. 교생..

환자들의 마음을 느끼며

진심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고 무슨 일에 대해 기뻐하고 누군가를 위해 슬퍼하는 마음의 울림이 점점 줄어든다. 나이를 먹어서 심장의 감정수용체들이 다 닳아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변명한다. 암환자를 보는 의사는 감정조절도 잘 해야 한다고 한다. 환자를 보면서 너무 기뻐하거나 너무 슬퍼하지 않도록 스스로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들 한다. 백프로 동의한다. 감정이 스며들고 마음이 젖으면 너무 힘들어서 다른 환자 보는데도 지장이 있고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기도 한다. 나이를 먹었으니 직업이 직업인만큼 마음이 점점 메말라간다. 메말라가기 쉽다. 그렇지만 아직은 일상의 다른 일에는 무관심해 지면서도 환자를 볼 때는 마음이 출렁거리는 것을 느낀다. 어쩔 수 없이 감정이 섞인다. 내가 비록 최고의 의사는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