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가슴으로 사랑하기 1020

나만의 VIP

솔직히 정이 가는 환자가 있다. 유난히 잘해 주고 싶은 환자가 있다. 모든 환자에게 똑같이 마음이 쓰이지 않음을 고백한다. 환자가 별 말 안해도 내가 알아서 꼼꼼히 챙기게 되는 환자가 있다. 이상하게 그런 환자가 있다. 토요 진료가 없는 주간에도 그를 위해 매주 토요일 그만을 위한 특별 클리닉을 열었다. 거동이 불편한 그를 위해 외래 오는 날과 검사하는 날을 맞춰서 한번에 오게 해 드렸다. 검사 일정이 잘 맞지 않으면 내가 직접 검사실로 연락해서 부탁도 드린다. 환자 형편이 이러이러하지 편의 좀 봐주세요. 말이 부탁이지 완전 푸쉬다. 어떤 환자에게 항응고제 약 처방이 빠진 적이 있었는데 직접 택배로 보내드린다. (물론 이건 나의 잘못이기 때문에 할 말은 없지만...) 매번 꼼꼼하게 신체 검사를 다 하게 ..

그리운 그녀

입원한 환자 때문에 뭔가를 고민하다가 다른 비슷한 환자들의 차트 리뷰를 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텀 내 파트를 돌고 있는 '천재 레지던트'의 도움을 받아 EMR을 이용해 내가 원하는 그룹의 환자의 명단을 뽑았다. 50명 정도 간추려진 환자들의 예전 차트를 열어보면서 리뷰를 하던 중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사실 이름만 봐서는 기억이 안났는데, 차트를 여는 순간 누군지 기억이 났다. 예쁜 캐나다 아줌마. 내가 레지던트 4년차로 일하던 2008년, 그녀는 유방암을 진단받고 입원하였다. 입원시킨 선생님이 원망스러웠다. 영어로 회진을 돌아야 했다. 명색이 종양내과 치프 레지던트라고는 했지만 사실 유방암이라는 병에 대해 아는게 별로 없던 시절이다. 그녀는 HER2 양성 그룹이었다. 그땐 나조차 ER P..

최선을 다하는 환자

멀리 경상도 사는 나랑 동갑내기 환자. 항상 남편이 같이 온다. 환자는 갑작스럽게 생긴 복시로 뇌전이를 진단받았다. 수술 후 치료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뇌전이를 진단받고 큰 상실감에 빠졌다. 뇌 방사선 치료를 받는 동안 어지럽고 너무 기운이 떨어져 병원에 내내 입원해 있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 그녀가 힘든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내 마음도 너무않좋았다. 매일 회진하는 동안 서로 마음의 불편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만큼 힘든 재발의 치료가 시작되었다. 항암치료를 다시 시작하였고 오늘은 3주기를 시작하는 날. 그녀는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이렇게 프린트가 된 치료 일지를 내 놓으신다. 첫칸에는 날짜, 둘째칸에는 증상, 셋째칸에는 자기 컨디션, 넷째 칸에는 식사량, 마지막 다섯째 칸에는 몸무게를 기록할 ..

치료를 마친 이들의 후기 합병증

급성기 치료를 마치고 일단 검사를 하면서 경과관찰을 하는 환자들, 혹은 5년간의 추적관찰을 마치고 암환자를 딱지를 떼어버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cancer survivor 라고 한다. 우리 말로 하자면 '암 생존자'인데, 아무리 봐도 별로다. 적당한 개념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블로그에서 제안을 해주신 분도 있었지만 그 또한 아직 내 마음에 꼭 와닿지는 않는다. 죄송해요!) 어떤 정의에 의하면 요즘에는 4기 암환자라 하더라도 예후가 좋고 생존기간이 길기 때문에 이들도 survivor 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환자 뿐만 아니라 가족도 그 멤버로 광범하게 포함시키는게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국림암센터가 주관이 되어 암 생존자를 위한 가이드북을 만드는데 그 집필진의 일원이 되어 치료를 마친 후..

우리의 김자옥씨들

오늘은 항암요법연구회 완화분과의 심포지엄이 있었다. 완화 의료 (palliative care) 는 항암치료나 방사선치료, 수술 등 치료적 목적으로 제공되는 의료서비스 이외에도 암환자의 증상 및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제로 연구하고 현실적인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학문 분야이다. 예를 들면 항암치료를 할 때 항구토제를 어떻게 쓸 것인지, 항암치료 중 호중구감소증이 왔을 때 외래에서 항생제를 처방하는 원칙은 무엇인지, 암성 통증을 보다 잘 조절하기 위해서는 약을 어떻게 쓰고 환자를 교육해야 하는지, 치료 중 정서적 불안이나 우울증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지, 그것을 조절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어떤 치료를 하는 동안 환자 삶의 질은 어떻게 변화하고 보존할 수 있는지, 치료 말기에 이르면 어느 시점..

여행은 좋은 것

유방암 치료 중 여행을 갈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몸 상태가 안정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환자들이 저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저 여행가도 되요? 선생님 저 비행기 타도 되요? 그럼요! 그렇게 물어보는 것 자체가 합격의 요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스스로 여행을 가고 싶은 의욕이 있다는 것, 스스로 생각해 봤을 때 여행을 갈만한 체력을 된다고 생각하니까 저에게 물어보시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아주 특별한 경우 아니고는 여행을 다녀오시라고 적극적으로 추천합니다. 그리고 차트에 꼭 써 놓죠. 어디어디 여행 다녀오실 예정이라고. 그리고 다음 외래 때 다시 여쭈어 봅니다. 여행 어떠셨냐고. 여행을 다녀오신 분들은 한결같이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너무 좋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가기 전에는 여러 모로 망설여 지는 게 많..

환자가 나를 위로한다

그녀는 현재 한국에 살지 않고 중국에서 살고 있다. 본인이 꼭 중국에서 해야하는 일이 있다고 했다. 중국에서 항암치료를 받던지 한국에서 항암치료를 받던지 한군데서 하는게 좋겠다고, 힘들어서 어떻게 왔다갔다 하겠냐고 했지만 그녀는 할 수 있다고 했다. 중국-한국 왔다갔다 돈도 많이 들고 힘도 많이 들텐데, 본인이 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이 치료 스케줄을 운영할 수 밖에 없었다. 아주 똑똑하고 딱부러지는 그녀. 난 그녀의 언변과 이성적인 논리를 이길 수 없었다. 환자는 난소암으로 항암치료 중이다. 지난번 임상 연구약으로 항암치료 했을 때는 별로 효과가 없었는데, 이번에 약을 바꾼 후 간에서 보이던 작은 종양들이 일단 눈에 안보이게 되었고 종양수치도 정상 범위로 떨어졌다. 항암치료 3-4번..

지금이라도 독감백신 맞을까요?

아침 병동 회진을 돌고 연구실로 들어오는데 전화가 온다. 여기 누구네 집인데 독감 백신 맞아도 되? 다짜고짜 전화를 해서 본인이 누구신지, 그 누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겠는 질문을 하시니 마음속으로 욱 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여쭙는다. 실례지만 전화하신 분은 누구신지요? 그 누구가 우리 병원 다니는 환자신가요? 저에게 진료받는 분이셔요? 말씀을 들어보니 환자는 60대 후반의 유방암 수술받은 할머니고 나에게 유방암 치료를 받으셨는데 얼마전 치료를 마친 분이다. 전화를 하신 분은 할아버지고 할머니보다 연배가 높으실테니 최소한 60대 후반은 넘긴 연세겠지. 어떻게 내 연구실 전화번호를 알아내셨는지 모르겠지만, 할머니 할아버지 연세를 고려해서 욱한 마음을 좀 가라앉혀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를 걱정한 ..

토론을 하면 할수록

동기들에 비해 나이든 아줌마 레지던트로 일하면서 굼떠보일까봐 열심히 뛰고 게을러 보일까봐 더 부지런떨고 나이들어서 별로라는 말 들을까봐 더 씩씩하게 일하고 멍청해 보일까 봐 열심히 공부하고. 다 자신있었는데, 열심히 공부해도 그만큼이 다 내 실력이 되는게 아니라는 사실이 제일 실망스러웠다. 아, 똑똑하고 지적으로 보이고 싶었지만, 그것만은 어려운 일이었다. 공부해도 모르는게 너무 많았던 것은 머리가 나빠던 탓인지, 나이를 먹어서 자꾸 잊어버리는 건지 잘 구별되지 않았지만 암튼 난 참 모르는게 많았다. 너무 모르는게 많아서 누구에게 질문도 제대로 못했다. 뭔가 질문을 한다는 건, 내가 뭘 모르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행위다. 난 내가 뭘 모르는지도 잘 몰라서 제대로 질문할 줄도 몰랐다. 그때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