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들에 비해 나이든 아줌마 레지던트로 일하면서
굼떠보일까봐 열심히 뛰고
게을러 보일까봐 더 부지런떨고
나이들어서 별로라는 말 들을까봐 더 씩씩하게 일하고
멍청해 보일까 봐 열심히 공부하고.
다 자신있었는데,
열심히 공부해도 그만큼이 다 내 실력이 되는게 아니라는 사실이 제일 실망스러웠다.
아, 똑똑하고 지적으로 보이고 싶었지만, 그것만은 어려운 일이었다.
공부해도 모르는게 너무 많았던 것은
머리가 나빠던 탓인지,
나이를 먹어서 자꾸 잊어버리는 건지 잘 구별되지 않았지만
암튼 난 참 모르는게 많았다.
너무 모르는게 많아서 누구에게 질문도 제대로 못했다. 뭔가 질문을 한다는 건, 내가 뭘 모르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행위다. 난 내가 뭘 모르는지도 잘 몰라서 제대로 질문할 줄도 몰랐다.
그때보다 지금 내가 조금 나아진 것은
내가 뭘 모르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줄 알게 된 것.
아는 척 하지 않고 솔직히 모른다고 고백한 다음 제대로 배우는 게 더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
옛날에는 윗 선생님들에게 질문 잘 못했는데, 이제는 용감하게 질문한다. 그리고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도 여쭙는다.
주로 유방암 환자를 보지만 여성암 환자도 많이 보고 위암이나 대장암 등 기타 암 환자들도 본다. 다양한 종류의 암환자를 진료하다보면 환자의 전신에 별 일이 다 일어나기 때문에 다양한 과로 환자 협진을 의뢰하게 되고 나도 암이 아닌 다른 분야에 대해 어느 정도 보편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게 필요하다.
비교적 문제를 일으키는 장기가 명확해서 협진을 결정하기에 별로 어렵지 않은 과도 있지만
어지러워요 - 이비인후과, 신경과
이가 아파요 - 치과
발톱이 파고 들어요. 갑자기 온 몸이 간지러워요 - 피부과
시력이 떨어지는 거 같아요 - 안과
잠이 잘 안와요 - 정신과
넘어져서 뼈가 부러졌어요 - 정형외과
비특이적인 증상을 호소할 경우에는 당장 어떤 과에 진료를 의뢰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기운이 없어요
자꾸 머리 아파요
너무 의욕이 없어요 힘들어요
숨이 차는것 같아요
배가 아파요
속이 쓰려요
이처럼 흔한 증상은 장기가 명확하다 해도 매번 소화기내과에 협진을 의뢰하기에도 민망하다. 내시경 해야 할 케이스를 중심으로 의뢰하는게 현명하다.
항암치료 중에는 온갖 증상이 발생한다. 그때마다 다 협진을 보낼 수가 없으니 내가 웬만한 꽁수는 부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꽁수 부리다가 환자 나빠지면 안되니까 결국 자신없으면 협진을 의뢰하게 된다.
(알레르기 파트로는 협진을 잘 내지 않는다. 나에게 알레르기 증상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나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약을 잘 쓰는것 같다 ^^)
병이 심한 환자들은 각종 관을 넣어야 한다. 복수나 흉수 배액이 필요한 경우 피부를 통해 복강이나 흉강으로 관을 넣기도 하고 항암치료를 반복하다보면 혈관이 약해진다. 그러면 포트도 넣어야 한다. 그래서 영상의학과 인터벤션팀에 신세를 많이 지게 된다.
뱃속 상태가 안 좋아서 소변이 잘 안나오면 요관에 스텐트를 넣어 달라고 비뇨기과에 의뢰를 하고
갑작스러운 장 폐색이 와서 음식을 못 먹고 토하게 되면 외과에 수술을 의뢰할 일도 생긴다.
뭔가가 동글동글하게 만져지면 서둘러 조직검사를 해야하니 영상의학과 초음파 검사실에 SOS를 보내고, 갑작스러운 통증 때문에 환자가 힘들어하면 마취통증클리닉에 당일로 환자를 보낸다. 내 외래는 푸쉬와 사정의 연속이다.
이렇게 여러 과와 접촉을 해야 하는게 종양내과 의사의 운명이다. 환자 형편을 알리고 부탁을 하느라 아쉬운 소리도 많이 하고 이래 저래 자꾸 부탁을 드리게 된다. 밤이면 밤마다 선생님들께 특별한 사연과 사정이 있는 환자의 형편을 알리느라 메일을 보내는게 일이다. 심지어 원무과에도 부탁을 드린다. 환자 상태가 않좋으니 입원자리 좀 빨리 알아봐 달라고 말이다.
늘 부탁하는게 내 일이다.
그래서 환자 상태와 관련하여 여러 과 선생님들과 토론을 자주 하게 된다.
예전에는 다른 선생님들이 말씀하시면 '네네' 했었는데
이제는 '왜요. 꼭 그렇게 해야 하나요? 선생님은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렇게 뻔뻔하게 질문을 많이 한다. 너무 무식한 질문을 하고 나면 나 스스로도 무안하고, 내 무식이 폭로되어 창피하지만, 사실 그만큼 내가 몰랐던 사실들을 배우는 기회가 된다. 그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니까. 그렇게 환자의 이슈를 두고, 증상을 두고, 사진을 두고 토론을 거듭하고 여러 차례 메일이 오가고 나면, 내 환자를 진료할 때 나의 내용이 풍부해지는 것 같다. 환자에게 설명도 더 잘해 줄 수 있다.
오늘 밤에도 많이 배웠다.
당신 마음으로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잘 설명해주신다.
감사하고 뿌듯하다.
교과서가 아니어도
배움은 끝없이 계속된다.
그것이 의사의 일상이고 평생가는 삶인 것 같다.
이렇게 진을 빼고 나면 논문은 언제 쓰지?
이 밤중부터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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