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가슴으로 사랑하기 1020

무사히 시간이 흘러도 기억해야 할 것

사람의 마음은 늘 정지해있지 않고 뭔가의 이벤트에 의해 시시각각 변화한다. 그래서 간사하다고 하는걸까? 환자들의 마음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변한다. 굳세게 마음먹고 열심히 치료하다가도 순식간에 무너지고 눈물을 글썽거린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허약해보여 또 자책한다. 그게 간사한 걸까? 당연한거다. 객관적 사실로 알려진 것들 병기와 예후, 치료법과 그 효과 및 부작용, 그리고 통계적인 생존기간 그런 정보들은 나를 중심으로 놓고 보면 크게 의미가 없다. 나는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고 기필코 좋은 성적은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하니까. 그러니까 통계적인 수치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래도 마음 한 켠에 불안함이 자리잡고 있다. 잊으려고 해도 또아리를 틀고 자리잡고 있다. 언제듯 깨어질 것 같이 여..

삭감 이의신청

내가 약을 쓴 것에 대해 삭감통보가 왔다. 난 열심히 소견서를 썼다. 항암제는 한번 삭감 당하면 액수가 크다. 그 환자의 상태, 주치의로서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 다른 약에 비해 이 약이 왜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지, 참고문헌을 인용하고 그래프도 붙이고, 내 진료의 정당성을 스스로 입증해야 했다. 아니, 의사가 자신의 전문적 지식에 입각해서 판단하고 처방했으면 됬지 이걸 또 증명해서 납득시켜야해? 그런 짜증 따윈 부리지 않는다. 어디 감히 짜증을! 난 늘 열심히 소견서를 쓴다. 삭감 당한거 환불받을려고. 우리 병원은 그 삭감액을 내 월급에서 공제하지는 않는다. 공제하는 병원도 있다. 환자를 위해 처방했다가 내 월급이 삭감당하는 꼴이다. 오늘 보험심사과에서 나의 이의신청이 받아들여져서 삭감되었던 돈이 들어..

AYAO (Adolescence and Young Adult Oncology)

AYAO 우린 아야오라는 줄임말로 읽는다. 용어 자체가 좀 낯설다. 굳이 번역하자면, 청소년/청년기 암을 분류하는 용어라고 보면 될것 같다. 특정 암을 지칭한다기 보다는 젊은 연령대의 환자를 중심으로 (NCCN 에서는 15세-40세로 구분하고 있음) 이들에게 주로 발생하는 종양 질환에 대해 의학적인 면을 포함한 다양한 측면의 지원과 포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분류된 것이 아닌가 싶다. 15세 이하의 나이에서보다 15세-40세 사이의 연령에서 발생하는 암의 유병율이 8배 이상 높다. 소아암이 어른의 나이에서 발생하듯이, 어른의 종양이 이 시기에 발생하기도 한다. 그런 경우 종양의 생물학적 속성은 어른의 그것과 다른다. 어른이든 아이든 같은 진단명이 붙어도 이들 연령대에 발생하는 종양의 생물학적..

처음으로 찍는 사진

6살 난 아이. 태어날 때부터 근육병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고개를 가누고 앉지 못합니다. 근육병에 이은 이차적 합병증으로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겼습니다. 요즘은 일주일에 세번씩 투석을 하며 비교적 안정적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감기 한번만 걸리면 바로 중환자실 행입니다. 두살 위 오빠가 동생을 끔찍히 아낍니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동생이 앉을 수 있도록 옆에 앉아 지지대가 되어 줍니다. 30대 중반의 엄마는 너무 많이 지쳐있습니다. 눈물도 말라버린 엄마. 많이 쇠약해진 아이는 언제 하늘나라로 떠날지 모르는 운명입니다. 그것에 대해 엄마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이가 떠나면 엄마는 아이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요? 아이의 사진이 한장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엄마의 마음에 순간 찬바람이 붑니다..

처음 본 환자에게

외래 초진 제가 처음 본 환자인데 그냥 원래 치료받던 곳에서 계속 치료받으세요. 우리병원 오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환자가 가지고 온 진료 기록을 보면 그 의사가 어떤 의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치료 과정을 검토해 보고, 나로서도 다른 이견이 없을 때, 공연히 병원을 옮기는 것은 환자에게 이득이 없으니 자신을 꾸준히 진료한 원래 의사에게 계속 치료받는게 좋다고 권합니다. 환자를 위해 그 사람만큼 오래 고민한 사람 없으니까 그를 믿으라구요. 초진이니까, 그날 외래 진료의 제일 마지막에 순서를 잡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다음 환자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면담하기가 어려워서 나 스스로 마음이 초조해집니다. 그래서 처음 온 환자를 많이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지만 그렇게 하고..

우리 마음의 허약함

잘 지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인 것 같습니다. 인간이 그렇습니다. 씩씩하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동창회 갔다가 잘 나가는 동기들을 보니 마음이 울적해 진다는 그녀. 내 인생은 뭔가. 스스로 다짐하고 다짐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남과 나를 비교할 필요없다고 생각하며 잘 치료 받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남과 나를 비교하며 실망하는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속도로 사는 거라고 다짐했건만. 우리는 그렇게 허약합니다. 나는 매번 그녀의 CT를 볼 때마다 마음을 졸였지만 그녀는 씩씩했습니다. 용감하게 잘 치료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간이 병을 못 견디는 것 같습니다. 딸과 함께 온 그녀에게 이제 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합니다. 짧으면 한달, 길면..

학생들의 힐링페이퍼 2

본과 4학년 선택 특성화 과정으로 '힐링페이퍼'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는 우리 학교 학생들과 요즘 자주 만나고 있다. 이들의 프로그램은 아직 완성단계가 아니다. 선택특성화과정 담당 지도교수도 아닌 나에게 와서 이것저것 질문하고 요청사항도 많다. 매일 외래가 끝나면 나는 파김치가 되는데 이녀석들은 외래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냉큼 진료실에 들어와서 질문하고 나에게 뭔가 도움을 요청하고 그렇다. 좀 귀찮기도 했다. 왜 나한테 그러냐... 나 힘들다... 이들의 힐링페이퍼 프로젝트는 유방암 환자들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원래 유방암이 타겟이 아니었던것 같은데 학생들 입장에서 내가 편했던 것일까? 다른 교수님들을 만나 환자들과의 인터뷰를 허락받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나 보다. 매일 내 외래가 진행되는 ..

치과 선생님과의 집담회

오늘 오후에 우리병원 치과선생님이신 박원서 선생님과 조촐한 집담회를 가졌다. 유방암 환자들 중에 뼈전이가 있을 때 pamidronate 나 zolendronic acid 와 같은 약제를 쓰면 골절이나 고칼슘혈증, 전이된 뼈가 나빠져서 방사선치료나 수술을 하게 될 확률 등을 낮출 수 있다는게 이미 교과서적인 원칙이다. 그래서 전이성 유방암이 진단되면 제일 처음으로 확인해야 하는 것이 뼈전이가 있냐 없냐를 보고 뼈전이가 있을 경우에는 항암치료를 시작함과 동시에 위의 약제를 병용투여하는 것이 치료 원칙의 1번이라고 각종 가이드라인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전이성 유방암 환자는 질병 경과 중에 궁극적으로 뼈로 전이될 가능성이 약 70% 정도 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어 이상의 약제를 쓰게 될 확률이 높다. 특히..

우린 환상의 콤비

나의 외래 진료방 간호사는 내가 한 명의 환자를 진료하는 동안 내 진료 책상 옆에 자기 책상에 앉아 내가 낸 오더를 확인하며 걸러주고 환자 설명문도 작성하면서 진료 준비를 도와준다. 환자가 나에게 부탁한 사항이 빠짐없이 오더로 나 있는지 잘 체크해준다. 그렇게 자기 자리에 앉아 일하나 싶으면 어느새 바깥으로 나가 대기하고 있는 환자들을 호명하고 진료를 마치고 나간 환자를 따라 나가 검사와 처방 관련 설명을 한다. 그 와중에 전화로 환자 검사 일정도 잡아주고 검사가 급한 환자를 위해 직접 전화를 걸어 푸쉬도 해준다. 환자를 내 가족같이! 그 말이 딱 맞는 사람이다. 내가 환자 한명을 보는 동안 몇번을 왔다갔다 하는지 모른다. 병이 나빠져서 내 설명이 길어지거나 환자가 여기 저기 불편한 증상이 많아서 진료시..

From the voice of the Patients

머리아프다고 하면 brain CT나 Brain MRI를 배아프다고 하면 abdominal-pelvic CT를 숨차다고 하면 chest CT를 찍어버리면 속이 편하다. 구조적인 이상이 있는지 알 수 있으니까. 또 믿음직스러운 영상의학과의 판독을 빌어 내 판단의 근거까지 마련할 수 있으니까 좋다. (이쯤 되면 이런 기준으로 영상 검사를 한다는 사실에 대해 분노하실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인정. 그러면 안된다는 거 안다는 뜻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상검사에 너무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런 사진만으로는 구조적인 이상을 알 수는 있지만 기능적인 이상은 알 수 없다. 뭐 그런 한계가 있다하더라도 부지런히 영상 검사를 해 버리면 큰 실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 진료패턴을 왜곡시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