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아프다고 하면 brain CT나 Brain MRI를
배아프다고 하면 abdominal-pelvic CT를
숨차다고 하면 chest CT를 찍어버리면
속이 편하다.
구조적인 이상이 있는지 알 수 있으니까.
또 믿음직스러운 영상의학과의 판독을 빌어 내 판단의 근거까지 마련할 수 있으니까
좋다.
(이쯤 되면 이런 기준으로 영상 검사를 한다는 사실에 대해 분노하실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인정.
그러면 안된다는 거 안다는 뜻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상검사에 너무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런 사진만으로는 구조적인 이상을 알 수는 있지만 기능적인 이상은 알 수 없다.
뭐 그런 한계가 있다하더라도
부지런히 영상 검사를 해 버리면
큰 실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 진료패턴을 왜곡시키고 있다 하더라도 손쉽게 검사처방을 내는 것이 나 개인의 서바이벌에는 도움이 된다. 성실하고 꼼꼼한 의사의 정성과 문진에는 진료비용에 책정되어 있지 않는 반면, 이런 영상 검사를 하면 이익도 많이 남는다. 건강보험 비용의 비현실성을 고려할 때 검사 안하고 내 머리로 골머리를 썪는것 보다는 그냥 검사처방을 내는게 여러 모로 이득이 많다. 이러한 제도의 헛점은 의사의 진료패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그래서 환자의 증상을 문진하고 직접 진찰하여
이상 소견을 밝혀내는 임상적인 능력은 도태되기 쉽다.
이러한 진료 패턴에 대해 우리의 윗 선생님들이 젊은 의사들을 비판, 비난하시는 것도 인정.
그렇게 비난하셔도
그냥 무책임하게 영상 검사 왕창해서 편히 진료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객관적인 검사라 하더라도 그런 검사결과 한번으로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애매한 상황이 있다. 그럴 때는 대개 1-2개월 정도로 경과관찰을 하거나 환자의 임상적인 증상을 확인하게 된다.
내가 환자를 처음 보자마자 하는 말,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이렇게 비특이적인 질문을 던지면
환자는 최근에 자신이 가장 불편했던 증상에 대해 말한다.
환자가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이게
병이랑 관계있는 증상인지,
치료랑 관계된 합병증인지,
암이랑은 완전히 무관한 다른 증상을 얘기하는 것인지 감별해야 한다.
머리 속이 팽팽 돌아간다.
암환자를 진료했던 일천한 나의 경험에 의하면
각종 객관적인 검사소견에 큰 이상이나 변화가 없다 하더라도
환자가 불편감을 느끼는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 원인을 찾는게 중요하다는 깨달음이다.
환자가 이상하다고 하면 뭐라 쉽게 그 원인을 설명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의심하는 것, 그러므로 환자의 증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추적관찰을 해야 한다.
환자가 불편해 했던, 잘 설명되지 않았던 그 증상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결국 환자의 병과 관련된 어떤 변화임을 깨닫게 될 때가 많다.
그래서 난
친절한 의사라서가 아니라
온전히 내 실력만으로는 환자를 제대로 진료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환자가 말하는 어떤 증상에 귀를 기울여 실마리를 찾고 내가 갖고 있지 못한 그 부족한 실력을 메우고자 하는 의사에 불과하다. 결국 진단을 도와주는 것은 환자의 목소리일 때가 많다.
다른 과나 다른 파트는 잘 모르겠지만
종양내과는 환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인 것 같다.
매일 매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새삼 후회한다.
잘 들어줄 줄 아는 능력도 부족하고
가끔은 - 어쩌면 자주 - 그런 목소리에 별로 귀를 기울이고 싶지도 않아하는 날나리같은 내가
종양내과를 하게 되다니...
의사의 시술/수술 실력이 중요한 그런 과를 했으면
환자의 목소리에 조금 덜 귀를 기울여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얄팍한 마음마저 든다.
환자의 목소리
나의 주관적인 판단
검사의 객관적인 증거
이런 것들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조합하여 정확한 판단과 진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명의가 되겠지.
환자가 말하는 모든 것이 다 실마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의미없는 정보를 걸러낼 줄 알아야 한다.
아직 나의 주관적인 판단은 보잘 것없는 수준. 진료경험이 많이 축적되면 어떤 영감(inspiration)이 생길 거라고 믿는다.
무조건적 이것 저것 긁어대는 검사가 아니라, 내가 의심한 것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액기스 검사를 하는 것. 그렇게 검사를 액기스로 잘 선별하는 것이 진짜 실력일 것이다. 그리고 쓸데 없는 검사는 안하는 것이 진정한 실력이다. 검사를 안 하는 것이 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시대이다.
환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의사가 되자.
말은 멋있지만
진짜 피곤한 일이다.
쿨하게 이성을 잃지 않고 환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으려면
나도 상당히 내공을 쌓아야 한다.
짜증내지도 말고
서두르지도 말고
무한정 늘어지지도 않아야 하는 그 조묘한 조합.
그것을 바탕으로 환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안 그러면 환자가 싫어지니까.
화내지 말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환자를 대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오랜 병으로 지친 우리 환자들의 목소리에서
어떤 것이 촌철살인같은 한마디인지 얻어낼 줄 아는 의사가 되게 해주세요.
환자에게 화낸 날 반성하는 일기.
'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 주치의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학생들의 힐링페이퍼 2 (2) | 2013.01.09 |
---|---|
우린 환상의 콤비 (5) | 2013.01.09 |
흔적 (2) | 2013.01.06 |
조직검사에 대한 단상 (2) | 2013.01.03 |
연말연시 뜻깊은 메일과 문자 (0) | 2012.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