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그리운 그녀

슬기엄마 2013. 1. 22. 20:55

 

입원한 환자 때문에 뭔가를 고민하다가  

다른 비슷한 환자들의 차트 리뷰를 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텀 내 파트를 돌고 있는 '천재 레지던트'의 도움을 받아 EMR을 이용해 내가 원하는 그룹의 환자의 명단을 뽑았다.

 

50명 정도 간추려진 환자들의 예전 차트를 열어보면서 리뷰를 하던 중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사실 이름만 봐서는 기억이 안났는데, 차트를 여는 순간 누군지 기억이 났다.

 

예쁜 캐나다 아줌마.

 

내가 레지던트 4년차로 일하던 2008년, 그녀는 유방암을 진단받고 입원하였다.

입원시킨 선생님이 원망스러웠다.

영어로 회진을 돌아야 했다.

명색이 종양내과 치프 레지던트라고는 했지만 사실 유방암이라는 병에 대해 아는게 별로 없던 시절이다.

 

그녀는 HER2 양성 그룹이었다. 그땐 나조차 ER PR HER2 에 대해 잘 몰랐다.

그녀에게 꼭 투여가 되어야 한다는 허셉틴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조기 유방암에서 보험이 안되는 약이었다.

일부 임상연구에서 수술 후 허셉틴을 쓸 수 있었고,

전이성 유방암에서 허셉틴을 보험으로 쓰게 된 것도 얼마 안 되던 때였다.

그리고 허셉틴은 특별한 독성이 없어 주로 외래에서 투약하는 약이라

입원환자를 주로 보는 나는 그 약에 대해 잘 몰랐다.

 

현재 HER2 양성 유방암은 종양크기가 1cm 를 초과할 때

수술 후 허셉틴 1년 유지요법이 보험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여러 임상연구 결과에 의하면

허셉틴은 수술 전에 쓰는게 환자에게는 더 도움이 된다.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수술 전 허셉틴 요법이 보험이 안된다.

 

여하간

그녀는 외국인이고

그녀가 들어놓은 사보험이 있어서

비용걱정없이 약제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수술 전에 6주기 동안 허셉틴을 맞고 수술하기로 했다.

그 첫번째 항암치료를 위해 환자가 입원을 한 것이다.

 

나는 환자에게 여러 잡다한 질문을 하는 것, 신체 검진을 하는 것 등을 다 영어로 해야 했다.

물론 그녀의 답을 영어로 듣고 이해해야 했다.

매일 아침 저녁 회진 때 고행이었다.

환자가 어찌나 예의바르고 예의가 있으신지

내가 못하는 영어로 더듬더듬 말을 해도 참을성있게 다 들어주셨다.

(나중에 알았다 그녀가 영어 선생님이라는 걸)

 

치료를 앞둔 그녀에게 항암제 종류, 항암제 치료 부작용 그런 걸 영어로 설명해 주어야 했다. 또한 허셉틴을 수술 전에 쓰는 의미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했다. 몇 번 치료하고 수술할 건지, 수술 후에도 치료가 끝난게 아니라 방사선치료와 호르몬 치료와 허셉틴 유지요법이 이어질 거라는 거, 왜 그런 치료가 추가로 더 필요한지 그 모든 것을 영어로 설명해야 했다.

 

외국인들은 질문도 많다. 그러므로 예상 질문까지 포함하여 영어로 대답을 준비해야 했다. 너무 괴로웠다.

 

도저히 그 모든 것을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 같아

난 영어 논문을 뒤져서 환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모아

짜집기 편집을 하여 아예 리포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치료 전날 밤, 내가 만든 그 리포트를 들고 환자에게 가서 설명을 했다. 어떻게 설명했는지 기억이 잘 안난다. 영어도 어렵고, 유방암 자체도 잘 모르고, 그 치료 과정을 소상히 잘 모르기도 했다. 내가 준비한 리포트를 읽으며 그녀는 여러 가지 질문을 했는데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도 안난다. 아마 제대로 대답을 못했겠지. 땀만 줄줄 흘리면서.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영어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유방암에 대해, 그리고 유방암 치료 과정의 현실을 잘 몰라서 그랬던 것 같다. 지금도 영어는 잘 못하지만 유방암은 그때보다 많이 아니까 막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영어를 쓰는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영어가 문제가 되는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환자는 내 말을 경청한다. 나는 의사니까. 그러므로 문법이 안맞고 어순이 엉터리여도 별로 문제가 안된다. 그림도 그리고 액션도 섞고 잘 못알아 먹는거 같으면 천천히 다시 설명한다. 다 설명하고 환자에게 묻는다. Any question?

 

많이 뻔뻔해졌다.

 

 

그렇게 첫 항암치료를 마치고 퇴원한 그녀.

난 레지던트라 외래에 들어가지 않으니 그 이후 그녀의 치료과정이 어땠는지 몰랐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영어 환자랑 굿바이한게 좋을 뿐이었다.

 

오늘 그녀의 차트를 다시 보니

그녀는 여전히 한국에서 살고 있고 6개월 간격으로 우리 병원을 다니며 정기검진을 받고 있으며 재발없이 잘 살고 있었다.

당시 6번의 수술전 항암치료를 하고 나서 수술을 했는데

유방과 겨드랑이 림프절에서 암세포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은

병리학적 완전관해 (pathologic complete response) 상태임이 보고되었다.

나는 이걸 홈런이라고 부른다. 그녀가 홈런을 쳤구나!

그때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데이터이지만, 최근 연구결과에 의하면,

HER2 양성 환자가 수술 전 항암요법에서 완전관해를 이루면 수술 후 재발 가능성이 매우 낮다. 

그녀에게는 더할 나위가 없는 좋은 결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HER2 양성은 수술 후 재발 가능성이 높고 공격적으로 전이하는 양상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 사람들은 허셉틴 보험적용이 안되서 약을 쓰지 못하던 시절이라 착찹한 마음도 든다.

 

그녀의 차트를 다시 보며

추억도 떠오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밤이다.

 

그녀가 보고 싶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제는 말도 안되는 콩글리쉬를 하면서도 뻔뻔하게 잘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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