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가슴으로 사랑하기 1020

온 병원에 흩어져 있는 나의 환자들

지난 몇달간 신환이 없었다. 그래서 요즘 내가 진료하는 환자들은다들 나랑 인연이 오래되서 척하면 척인 사람들이다.싸울만큼 싸우기도 했고, 원망도 하고 화해도 하고 그러기를 몇번 한 사람도 있다.서로에게 삐진 적도 있지만 병이 좋아지면 우린 금방 화해할 수 있었다.서로에게 익숙해 질 때까지 시간이 걸렸고 우리는 그 힘든 시간을 잘 견디고 지금의 관계가 되었다. (아마 나를 견디지 못한 환자들은 다른 선생님을 찾아 떠났으리라) 그래서 내가 검사결과를 꼼꼼히 알려주지 않아도, 약 처방에 빵꾸가 나도, 대기 시간이 길어져도, 원하는 날짜에 검사를 할 수 없어도, 이제 섣불리 화를 내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그냥 나를 이해해 주는 것 같다. 선생님 정신 없으니까 내가 참아야지. 별로 서운해 하지도 않고 나에게 따지..

비합리적인 것 같지만

나의 이모부는 그냥 회사원이고, 평사원으로 시작해서 적당히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속도로 승진하여 지금은 간부로 일하시고, 정년할 때까지 회사에 다닐 예정이시다. 아들 둘을 둔 한국의 50대 가장. 이모부는 온갖 가족모임을 준비하시는데 모이는 시간, 장소, 돈, 이동수단, 시간표, 일정, 식사 등 모든 시간표와 관련 업무를 엑셀로 표를 만들어 가족별로 분담시키고 목적지 지도와 사진 등을 첨부한 문서를 준비하여 미리 나누어주신다. 대규모 가족여행을 가면 사전답사, 여행 당일 안내, 일정 체크, 돈관리, 안전사고 예방까지 당신이 다 하신다. 가족의 보물이다. 이모부는 말씀을 재미있고 조리있게 잘 하시는데 평소 말씀을 많이 하시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 가끔 누군가에게 짧은 코멘트를 하신다. 예를 들면 내 동생이..

[주의] 이상한 댓글이 달리고 있습니다

3일 전부터 무작위로 예전에 제가 썼던 오래된 글에 댓글들이 달리고 있는데 제가 아무리 필터링을 하면서 관련 URL을 차단해도 계속 댓글이 달리고 있습니다. (오른쪽 Recent Comment 이에요) 제가 좀 해보다가 포기하고 티스토리에 신고를 했지만 큰 기대는 안하고 있구요. 동생한테 좀 봐달라고 했습니다. 해결될 때까지 양해해주세요. 혹시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아시나요? 전 처음이라 당황스럽네요.

오늘은 주무세요

환자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며 고생하다가 아침에 회진을 갔더니 나에게 메모를 건넨다. 지금의 내 상태는 산소없이 스스로 생존하지 못합니다.자신의 생존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셈입니다.마스크에 이어진 산소가 끊어질까봐 온 신경을 쓰며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안정제, 진통제, 수면제, 왕창 투여하면서 산소를 끊어버렸으면 좋겠습니다.숨차하면서 고통스럽게 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면서 죽으면 좋겠습니다. 환자는 그저께부터 마스크를 통해 산소를 최대한 공급받으며 호흡을 유지하고 있다.폐로 병이 많이 진행되어 그렇다. 심폐소생술이나 인공삽관은 하지 않기로 했다. 혈압이 떨어져도 아무 조치도 하지 않기로 했다.환자 스스로그리고 환자 아머니도 그렇게 결정하셨다. 단호하게. 환자는 나랑..

Flying Fish

1992년작흐르는 강물처럼 (A river runs through it)난 그 영화 포스터가 좋다. Flying Fish, 그 낚시대의 끝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그 흐르는 곡선을 보면,그 흐르는 강물을 보면,나도 그 안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포스터에서 플라잉 피쉬를 하고 있는 건 아마 둘째 아들이 아닐까?아버지의 뜻에 따라 모범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형과는 달리그는 목사인 아버지의 엄격함을 따르지 않았고낚시하는 법 마저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였다. 그리고 그는 흐르는 강물처럼 자유롭게 살다가 죽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산다는 것은모든 것을 수용하고 포용하며 평화롭게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을 주장하지 않고흐름에 자신을 맡긴 채 항상 새로운 곳을 찾아 흘러간다. 그래서 존..

편지하세요

아저씨들은 아파도 아프단 말씀을 안하신다.이리 저리 말을 바꿔서 다양하게 질문을 해봐야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대략 파악할 수가 있다.그냥 인자한 표정으로 자신의 품격을 유지하며 견딜만하다는 대답을 하시는 정도다. 내가 주로 여자 환자를 진료해서 그런지이에 대별되는 남자 환자들의 특징이 잘 느껴진다. 일단당신 말씀을 잘 안하신다.질문도 별로 없으시다.당신 증상에 대해서도 표현을 잘 안하신다.그래서 어디가 얼만큼 불편한지, 통증은 어떤지, 새로 생긴 증상은 없는지, 약물 부작용은 없는지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또 검사 결과나 다른 설명을 해 드려도 별로 반응이 없다.평소 여자 환자들과는 수다스럽게 별 얘기를 다 하는 나로서는 좀 어색하기도 하다.여자 환자들은 내가 무슨 말 한번 하면 그건 왜 그러는 거냐..

좋아하는 나에게 아무말도 못하고

70세 넘은 할머니가탁소텔 9번을 잘 견뎠다.체중도 별로 안 변하고입맛도 별로 안 떨어지고무엇보다 간전이가 많이 좋아지셨다. 두번 항암치료 하고 CT를 찍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할머니 연세도 많으시고조영제 쓰는거 부담이 되어서 꾹 참고 세번 항암치료를 마치고 CT를 찍었더니 아주 많이 좋아지셨다.나는 또 참지 못하고 좋아하는 티를 내 버렸다.할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걸 보니 많이 좋아지긴 좋아졌다 보다 하셨다.CT 보여드렸지만내가 본다고 뭘 알겠어 그냥 하라는 대로 하는거지 뭐 그러셨다. 탁소텔은 3-4회 이상 맞으며 전신부종이 동반되는 경우가 흔하고 말초혈관염도 심한 약이라 6번 정도에서 약을 중단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할머니는 그런 부작용이 없었다. 70 넘은 할머니가 대단하다 싶었다. 그렇지만 ..

뇌전이 검사, 미리 해보면 안될까요?

어떤 스크리닝 검사를 하는 것이환자에게 이득이 될 것인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일찍 검사해서 발견을 빨리 했을 경우 치료를 잘 해서 생존율이 향상되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필요하다. 유방암 수술을 하고 현재까지 할 수 있는 표준적인 조치로 모든 치료를 다 했을 때현재의 가이드 라인에서 권고하는 검사 간격은 대개 6개월, 위험요인이 있으면 3개월 간격으로 병원에 내원하게 한다.3개월 간격으로 검사를 하라는 말은 아니다.의사가 진료하고 유방 수술 부위를 점검하고 환자에게 다른 불편한 증상이 없는지를 경과관찰 하라는 의미에서 병원에 내원하게 한다.세계적인 가이드라인에서 제시하는 검사항목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검사항목보다 훨씬 단촐하다. 미국은 비용이 많이 드니까, 유럽은 국가가 돈을 많이 내야 하니까,..

고딩 엄마들 진료실에서 만나다

남들보다 항암치료를 힘들게 받은 그녀.탁소텔 맞으면 원래 몸이 좀 부어서 못 먹어도 몸무게가 늘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환자는 치료 중에 어찌나 못 먹고 힘들어 했는지 항암치료를 마치고 나니 몸무게가 7-8kg 가까이 줄었다. 항암치료 후유증 때문에 기운이 없기도 하고빠른 시간 내에 몸무게가 너무 갑자기 줄어서 기운이 없기도 했다.식욕이 없어서 식욕촉진제를 드려보기도 하고 하고폐경기 증상 때문에 온 몸이 아파서 각종 진통제를 드려도 봤다.약 부작용이 너무 심해 그런 약들의 효과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우여곡절끝에 치료를 다 마쳤다. 오늘은 치료를 마치고 처음으로 유방암 종합검사를 하였다. 결과는 오케이. 아무 이상이 없으시다. 보통 검사 결과가 좋네요. 다행이에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대개 환자들이 활..

빚쟁이 인생

3월 들어 매주 발표가 2번 정도 있다.외부 강의도 있고원내 발표도 있고발표를 하는 건나에게 남는 게 없는 장사지만그래도 요청이 있을 때 적절한 이유를 댈 수 없으면 결국 하게 된다.잠 설쳐가면서 준비하고제대로 준비가 안 되 괴로워한다.그런 시간을 일주일에 두번씩 거치고 나니,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꼭 거절해야지 그런 결심을 하게 된다.그런 발표 준비할 때 은근 강박적인 습성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대충 못하고 괴로워 하면서 준비하는 나를 발견한다. 출처가 명확하지 않으면 다시 저널을 찾아 페이지까지 꼭 명시하고적절한 그림, 사진 찾을 때까지 구글링하고 글씨 크기 정확히 맞추고색깔 통일적으로 쓰고 밑줄 부호 도형위치를 정확히 맞추느라마우스질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아주 피곤한 스타일로 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