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993

콩 화장품 임상시험에 참여하며

콩 화장품 임상시험에 참여하며 명단에 뜨는 할머니 나이는 만 70세인데 실재 나이는 74세라고 하셨다. 빈말 아니고 할머니는 60세 정도로 보인다고 말씀드리니 정말 좋아하신다. 특히 피부가 진짜 좋으시다고 하니 ‘내가 이나이에도 여자라고 일주일에 팩을 3번은 해요.’라며 자기관리의 정수를 보여주신다. 처음 위암을 진단받으셨는데, 대동맥 주위로 림프절 전이가 있어서 수술이 어려운 병기로 진단받으셨다. 원격 전이는 없으시지만, 병기 분류체계에 의하면 4기 위암으로 진단되신 셈이다. 사진을 보는 순간 정말 아까웠고 아주 원칙적인 판단은 아니지만 항암치료를 해서 효과가 좋으면 나중에 수술을 고려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욕심이 들었다. 환자에게 처음부터 너무 많은 불안과 절망을 주어서도 안되지만 과하게 희망을..

진단서를 작성하며

진단서 내 이름으로 외래를 처음 개설하기 전날밤, 얼마나 설레었던가! 명실상부한 전문의가 된 기분이었다. 외래는 입원환자 보는 것과는 다르니 환자를 보면서 당황하지 않도록 미리 예습을 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으로 EMR을 열었다. 엥, 왠 진단서 발급을 요청하는 사람이 이리 많은고? 정작 외래에는 환자가 아닌 보험회사 직원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고 보험회사마다 다양한 형식의 진단서, 진료확인서, 소견서를 요구하고 있었다. 보험 회사에서 요청하는 정보는 여러 모로 다양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수술 후 암세포가 확인되었는지, 병기와 현재 상태는 어떠한지, 치료 방법은 입원인지 외래인지, 입원이라면 낮병원인지 아닌지, 치료 약제는 무엇이었으며 주기는 얼마 간격인지, 치료를 중단하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Compassion fatigue

Compassion fatigue 오늘은 내 생일이다. 이제 누가 ‘생일 축하한다’고 말해줘도 뭔가 어색하고, 나이 먹는게 새삼 느껴져서 피하고 싶은 마음도 든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해 한해 반복되는 생일이 무섭기조차 하다. 무서운 이유는 이제 더이상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 두려운 게 점점 많아진다는 것, 의욕이 없어지고 뭘 봐도 무덤덤하다는 점이다. 내가 아직 이럴 때가 아닌데, 내가 원래 이렇지 않았는데, 자꾸 무덤덤해진다. 나라고 별 수 있겠어, 누가 뭘 잘 못해도, 나도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런 흐리멍텅한 생각만 든다. 이런 정신적 노쇠함이 나를 늙게 만드는 주범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레지던트 1년차 첫날 아침 prerounding을 돌며 떨려했던 바로 그 순간이 아직 생생한..

외모도 중요한 젊은 암환자들

외모도 중요한 젊은 암환자들 같은 환자라도 내 또래, 혹은 나보다 어린 젊은 암환자들을 만나면, 마음이 진짜 안좋다. 그들을만날 때, 의사로서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심호흡을 해야 한다. 정서적인 동요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완치가능한 치료를 하는 환자들, 예를 들면 수술 후 재발방지를 위한 보조항암치료를 하거나 항암치료 만으로도 완치를 기대해볼 수 있는 Lymphoma나 Leukemia 환자들, 비록 항암제가 구식이고 치료과정이 다른 암보다 훨씬 힘들긴 하지만, 고생한 보람이 있어 완치도 되고 치료 효과도 좋은 Osteosarcoma, Germ cell tumor 등으로 투병중인 어린 환자들을 만나면 그래도 할말이 있고 회진 때 마음이 덜 무겁다. 지금은 비록 병원에서 고생하고 있지만, 조만간 ‘정상 ..

한쪽 가슴으로 사랑하기를 소개하며

한쪽 가슴으로 사랑하기 고등학교 졸업-의과대학 입학-인턴-레지던트가 되기까지의 정규코스에서 단 한차례도 미끄러짐없이 의사가 되기 위해 달려온 그녀가 힘든 레지던트 1년차를 거의 마쳐갈 무렵, 유방암을 진단받는 것으로 이 책은 시작한다. 그녀를 위해 겉으로 드러나는 대화체는 아니지만, 이 책의 구성은 환자인 그녀와 의사인 내가 병에 대해 상의하고 견디며 나눈 대화를 정리한 셈이다. 조직검사를 한 후 떨리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지만 3기로 진단받고 망연자실해 하는 그녀. 그런 그녀를 앞에 두고 유방암의 특징, 치료 과정과 스케줄을 설명해야 하는 나. 수술 전 항암치료를 시작하는 그녀의 마음 속에 회오리치고 있을 수많은 고민과 갈등, 그러나 짐짓 모른 척 항암제의 부작용과 독성을 설명하고 잘 견디라고 말하는..

응급실에서 병실 배정을 논할 때

병실 배정의 슬픔 소세포폐암 3기B단계면 병이 많이 진행되어 수술은 어렵지만 완치를 기대하고 방사선 항암 동시요법을 시도해볼 수 있다. 7-8주간의 방사선치료와 매주 항암치료를 받는 과정은 무척 힘들다. 4기가 아니라는 안도감과 완치가능하다는 통계에 기대어 환자들은 기를 쓰고 이겨낸다. 전라도 끝 마을에서 농사짓는 할아버지, 방사선항암요법이 끝난지 6주 만에 응급실에 내원하셨다. 뭐가 힘드냐는 말에 ‘그냥 힘이 좀 없고 기침을 많이 해서 불편하다’며 별 말씀이 없으시다. 갑자기 커진 심장과 양측 늑막은 물이 고여 뭉툭하다. 혈압은 68/41mmHg. 엊그제 치료 반응평가를 위해 찍은 흉부CT에서는 심장 주위로 3cm이 넘게 물이 고여있다. Cardiac tamponade! 환자는 산소 마스크 7 lite..

Painful Memory Again

Painful Memory Again 경험많은 모 외과의사가 이제는 어엿한 중견의사로 활약하고 있는 의국의 후배들과 함께 한 모임에서, 즉흥적이 아닌 준비된 원고로 발표를 하였다. 제목은 ‘Painful memory again’. 내가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제목만 보아도 무슨 내용이었을지, 후배들에게 얼마나 강한 인상을 주었을지 짐작이 된다. 한 분야의 명망있는 외과의사가 의사로 살면서 자신이 저지른 크고 작은 실수들, 때로는 부주의하게, 때로는 몰라서, 때로는 우연히, 바로 그 자신의 손에서 행해진 행위로 인해 환자들이 나빠지고 때론 죽기도 했을텐데, 그걸 고백하며 후배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의사는 환자를 통해서 배운다. 그러니까 늘 환자에게 고마워 할 줄 알고 미안해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다시 시작하는 슬기엄마의 Season 3

다시 쓰는 슬기엄마의 일기 2주간의 투병기 체력좋은 내가 몸이 극심하게 피곤할 때면 슬기를 낳고 생긴 치질이 Grade 3로 나타난다. 불편하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환자수가 cut-off point를 넘어가면 가끔 재발되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2년차 전공의 시절, 제때 화장실도 못가고 쫓기듯 살면서 얻은 방광염도 가끔 나를 괴롭히기 때문에 아랫배의 불쾌한 느낌이 엄습할 때면 Low GI tract에 뭔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내시경을 위한 bowel prep도 선뜻 내키지 않고, 누군가에게 내 엉덩이를 들이밀고 검사를 당하는 것은 더욱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검사와 진료가 더 꺼려졌던 것은 혹시 뭔가 큰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고… 3주전부터 화장..

수현 14. 유방암을 넘어 새롭게 살아가기 Living beyond breast cancer

Living beyond breast cancer 수술과 항암, 방사선 요법을 다 마친 유방암 환자는 이제 6개월에서 1년에 한번씩 외래에서 재발 여부를 판정하는 검사를 하면서 추적관찰을 하게 된다. 유방암 세포에서 호르몬 수용체가 양성이었던 환자들은 추가로 항 호르몬제를 복용해야 한다. 항호르몬제를 복용하는는 기간은 환자가 폐경기인지 아닌지 여부에 따라 복용하는 약제의 종류와 먹는 기간에 차이가 있다. 폐경 전이며 5년, 폐경 후이면 10년까지 하루에 한알씩 항호르몬제를 먹는 기간이 더해지지만, 항호르몬제는 부작용이 심하지 않아 비교적 잘 견디고 일상생활을 하는데 지장이 거의 없어서 환자들 스스로도 항암치료를 지속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나 항호르몬제를 꾸준히 복용하는 것은 재발 방지에..

수현 13. 암을 치료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왜 좋은 의사가 되지 못하는가

암을 치료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왜 좋은 의사가 되지 못하는가 먹을 수 없는 그림의 떡만 많아진다 모든 학문이 그렇겠지만 종양학은 유독 발전의 속도가 매우 빠르고 변화가 많은 것 같다. 분자유전학의 발전으로 실험 및 검사 기법이 고도화되고 이를 학문 발전의 원동력 삼아 엄청난 논문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러한 자연과학과 기초의학의 지식 및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지금 이 시간에도 수천종의 신약이 개발되고 있고 그 중 극소수의 약이 살아남아 환자 진료에 사용되는 과정을 밟을 수 있다. 초기 약 개발 및 실험비, 관련된 연구비 뿐만 아니라 개발된 약으로 진행하는 임상시험과 관련된 비용이나 홍보비 등 다양한 제반 비용 모두가 궁극적으로 약값에 포함될 것이므로, 환자 진료에 사용될 정도로 살아남는 신약은 엄청나게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