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993

나를 위한 배려

나를 위한 배려 2002년 나는 본과 3학년 실습학생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새벽에 헬스클럽을 다녔는데 병원 실습이 시작되니 과마다 스케줄이 달라 정기적인 운동시간을 확보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 무렵 마라톤이 유행하기 시작하여, 일산에 사는 나는 호수공원 마라톤클럽에 참여하기로 하였고 주말이면 일산 호수공원을 비롯해 다양한 달리기 코스를 개발해 뛰기 시작하였다. 운동이라는게 한번 빠져들면 약간 중독이 되는 경향이 있어서인지 난 주말이면 몸 컨디션을 만들어 서너시간씩 달리기 연습을 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일요일 아침 6시에 호수공원에 나가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너무 불안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연습하여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에게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끝까지 다 뛰었다는 것 ..

평생 공부를 한다는 것은

공부를 한다는 것은 나는 오늘 우연히 모 교수님이 당신 혼자 공부하시며 정리해둔 파일을 하나 입수했다. 당신이 공부하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림, 사진, 메모들을 파워포인트에 정리해두셨다. 파워포인트 파일제목도 시원찮고, 편집도 안한 막파일이라 흰색 바탕에 통일된 글자체 한가지, 그리고 PDF file에서 복사한 그림들, 뭔가 연결된 흐름으로 메모와 사진과 그림이 이어지고 있는 듯 하지만 나로서는 그 흐름을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선생님은 파워포인트 한장 한장마다 아랫쪽에 출처를 명시하셨다. 저널이름, 발행연도, 페이지까지 소상이 기록해 놓으셔서 난 전자도서관에 들어가 저널 뒤지기를 시작했다. 아쉽게도 저자이름을 기록해놓지 않아 저널을 찾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마치 남들의 눈을 피해 도둑질하..

죽음을 준비하는 길에 정도가 있겠는가...

4년전에 다발성 골수종을 진단받은 64세 할머니. 지난 4년간 3번의 골절로 정형외과 수술을 받으셨다. 다발성 골수종이라는 병의 특징상 제대로 된 면역 글로불린이 형성되지 못하기 때문에 잦은 폐렴과 기타 감염으로 1년에도 수차례 입퇴원을 반복하고 있다. 병이 조절되었다가 안되었다가 하기를 반복하기 때문에 여러 항암제들을 바꿔가며 투여해왔고 최근 들어 전체적으로 병이 악화되는 코스로 진행하시는 것 같다. 최근 다발성 골수종에 효과적인 좋은 약들이 많이 개발되었지만 그 중 일부만이 국내에서 사용가능하고 그나마 약값이 너무 비싸서 왠만한 사람들은 엄두조차 낼 수 없다. 다른 약제에 반응하지 않는 불응성 다발성 골수종에 사용할 수 있는 레날리도마이드라는 약은 하루 한알 먹는데, 한알에 50만원이 넘는다. 한달에..

가정의 달, 가족을 생각하다

가정의 달, 가족을 생각하다 중학생이 된 슬기, 이제 어린이날 선물을 안 챙겨 줘도 되는 청소년이 되었다. ‘쿨하다’는 말을 좋아하는 슬기는 나에게도 상당히 ‘쿨’해서 나를 괴롭히는 일도 없고 특별히 엄마에게 요구하는 것도 없으며 나의 비가정적 생활에 대해서도 이해를 잘 해주는 편이다. ‘자기주도적 학습’을 강조하는 아빠랑 상의해서 학교 공부는 해결하고 있는 것 같다. 슬기가 요즘 학교에서 뭘 배우는지, 학원도 안 다니는데 공부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문제집은 샀는지 난 그런 소소한 사항들은 잘 모른다. 늦게 퇴근했는데 슬기가 아직 안자고 깨어있으면 시간가는지 모르고 수다를 떨고, 수준이 격상된 슬기의 농담에 감동받아 웃다가 괜히 애를 늦게 재우는 나쁜 엄마이다. 슬기와 슬기 아빠는 성격적, 정서적으로 ..

강의는 시작되고 학생은 졸기 시작한다

강의는 시작되고 학생은 졸기 시작한다 의대 수업의 90% 이상은 칠판판서와 필기를 하기보다는 - 요즘이야 의대가 아니더라도 이런 수업을 하는 과가 많지는 않겠지만- 각종 그림과 표로 넘쳐나는 슬라이드를 보면서 진행된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사진과 그림, 표들이 지나가기 때문에 필기는 포기한다. 그냥 되는대로 열심히 듣고 나중에 기억나는 것만 이해해야지 뭐, 누군가 필기를 잘 해놨을거야, 그거나 복사하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화면을 응시하는 수 밖에 없다. 슬라이드 화면이 잘 보이려면 강의실 조명은 최대한 낮추는게 좋다. 특히 엑스레이나 CT 등 영상 사진을 보는게 중요한 수업이라면 완전히 깜깜하게 조명을 끄고 시선을 화면에 집중하도록 하는게 필요하다. 나는 정신집중!을 외치며 빨간 레이저 포인터를 따라 ..

급여 비급여 임의비급여....

“그 환자는 우리 병원에서 오래 치료받은 분이에요. 비급여 약제를 쓰더라도 소송을 걸 가능성이 거의 없으니 본인이 약값을 부담하게 하고 이 약을 쓰겠습니다” “지금 이 약제조합은 사전신청이 들어간 상태니까, 내년에 심의를 통과하면 그때 100:100으로 처방하여 쓰시면 안될까요? 지금 이 약을 쓰면 임의비급여가 됩니다” “아니, 지금 병이 나빠져서 환자가 증상이 심해지고 있는데, 2주 이상 기다리라는 말인가요? 어차피 보험도 안되는 약이고 환자가 자기돈 내고 치료를 받겠다는데도요?” “임의비급여로 처방하시면 불법진료라 소송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환자에게는 이 약이 가장 적절한 선택입니다. 저는 쓰겠습니다” 환자 본인이 비급여로 약값을 전액 지불하더라도 그 처방 항목이 100:100이..

학회에서 '꼼수'를 나누는 교수님들

난 학회에 가면 구석에 숨어 열심히 필기하고 강의를 듣는 편에 속한다. 교수님들은 잘 모르더라도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시지만, 질문도 실력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질문 제대로 못했다가 바보되는 거 많이 봤다. 아직은 구석에 찌그러져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내 수준에 맞다고 생각하니 하루 빨리 플로어에 나가 당당하게 질문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얼마 전 학회에 갔다가 뒤에 앉았더니 집중도 잘 안되고 화면이 잘 보이지도 않아서 제일 앞줄로 나가서 강의를 듣기로 했다. 앞에 앉으니 강의를 하시는 선생님들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나야 종양학을 공부하겠다고 입문한지 2년째에 불과한 강사 신분. 선생님들 강의를 듣기만 하고 멀찌감치서 뵙던 분들이..

선생님의 가운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나?

선생님의 가운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나? 의사 가운도 패션시대. 우리에게 익숙한, 빳빳하게 풀을 먹인 흰색가운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스타일을 넘어, 은은한 파스텔 톤의 맵시있는 쟈켓 형태나, 세련된 셔츠 형태로 가볍게 변형시킨 여름 가운들도 선 보인다. 내가 세브란스 병원 레지던트로 일할 때는 무릎 위 정도의 길이로 된 긴 가운을 입었고 교수님이나 임상강사들은 자켓처럼 짧은 가운을 입었기 때문에, 멀리서 짧은 흰 자켓이 보이면 ‘아, 높은 선생님들인가보다’ 알 수 있었다. 몸에 딱 붙는 맵시있는 짧은 가운이 꽤 부러워 보였다. 나도 전문의가 되면 저렇게 폼 나는 가운을 입을 수 있겠구나… 아쉽게도 지금 일하는 삼서서울병원은 전공의나 교수님이나 임상연구센터 연구원이나 다 같은 스타일의 가운을 입으니 폼 잡을 ..

나를 위한 기도

나를 위한 기도 나는 천주교 신자이다. 그러나 믿음이 아주 깊지도 않고 성당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며 내 생활 자체가 종교성이 강하지도 않다. (하느님, 죄송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주말미사를 참석하는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신자의 의무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난 사실 지난 8개월 동안 주말미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심지어 12월에는 성탄미사도 안 봤는데, 안 봤다고 해서 마음이 아주 괴롭거나 몹쓸 짓을 했다는 죄책감도 크게 심하지 않다. (하느님, 정말 죄송합니다). 솔직히 성당을 안가면 슬기와 엄마가 나를 아주 몹쓸 사람 취급하기 때문에 눈치를 보며 가는 측면이 강하다. (엄마, 죄송해요.) 나는 그렇게 나이롱 신자이지만, 그 나이롱 끈이라도 놓지 않고 살려고 하는 것은, 병원에서 지내다보면 인간의 한..

슈퍼맨 할머니 파이팅!

슈퍼맨 할머니 파이팅! 내가 만나는 환자들은 대부분 4기 암환자이다. 4기 암환자라는 진단을 받으면,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고 치료받고 ‘암환자로 살아가기’까지 환자들은 눈물겨운 투쟁과 아픔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잘 이겨내고 슈퍼맨으로 거듭나는 분들이 있다. 75세가 넘은 할머니, 유방암을 처음 진단받고 수술받은 것이 1992년이니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이다. 첫 수술 후 7년째 되던 해에 유방암이 있던 쪽 흉곽에서 병이 재발하여 재수술을 하고 첫 항암치료를 받았다. 그로부터 5년 후 이번에는 흉골뼈와 주위 림프절로 전이된 병이 발견되었고 환자는 국소 방사선 치료를 시작하였고 추가적인 항암제를 쓰지 않고도 호르몬제만 유지하면서 병이 잘 조절되는 듯 하다가 3년이 지난 2007년에는 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