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993

허약한 시스템과 과잉 적응된 개인

허약한 시스템과 과잉 적응된 개인 소위 ‘의사’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환자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환자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것을 우선시하는 것이 직업적 윤리에 적합하다(매우 식상한 발언이다). 그러나 한 달 남짓한 병원생활을 겪으며, 여러 과에서 인턴 업무의 중심축이 환자 care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기보다는 의사들 사이의 왜곡된 권위의식과 의국 내 질서의 유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다. 예를 들면 환자에게 왜 수술이 필요한지, 수술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며 예후와 예상되는 합병증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더 나아가 환자의 직업과 가족 관계 등을 고려했을 때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하는지 등의 내용이 논의되는 시간보다는, 과 내에서 입퇴원 장부를 작성하기 위해 인턴부터 레지던트 4년차까지 밤을..

나는 어떤 경우에 달리는가

나는 자꾸 irritable하게 움직이는 환자를 원망하며 한 손으로는 환자의 두 손과 배를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환자의 턱을 붙잡고 있었다. 오늘따라 CT찍는 시간이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지? 납옷을 입어서인지 몸이 축축 늘어지는 것 같아 힘들다. 누워있는 환자를 내 몸으로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한 채 CT 촬영이 끝나기를 기다리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끝나는 기색이 없어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컴컴하게 어둠에 쌓인 방. 분위기가 이상해서 나는 누워있는 환자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내 몸무게에 짓눌린 채 괴로워하는 환자는 바로 내 남편. 아마 나는 가위에 눌려 꿈속에서도 인턴으로 일하고 있었나보다. 의사가 되어 처음 근무한 신경외과에서의 한 달간 인턴생활, 그 사이에 내 몸에 각인(embo..

레이트 어답터(Late adapter)의 비애

5년 전, 우리 병원에 전자차트(Electronic Medical Record)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나는 당시 오더도 제일 많이 내고 차트와 함께 몸부림치며 살아야 하는 레지던트 1년차였다. 시스템이 바뀌었다고 처방을 못 내거나 환자 진료에 차질이 생긴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새로 바뀐 EMR 시스템에 적응해야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정보통신팀에 전화를 해야 했고, 오더를 내다가 막히면 젊고 똘똘한 동기들에게 물어봐서 내가 풀지 못한 당면과제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 젊고도 빠릿빠릿한 동기들은 같은 오더를 내더라도 클릭을 몇 번 하느냐가 나랑 달랐다(물론 그들의 클릭 수가 훨씬 적었다). 처음 가동되는 덩치가 큰 EMR은 클릭 한 번 하고 화면이 넘어가는 데 시..

마라톤 풀코스 완주의 추억

마라톤 풀코스 완주의 추억 2002년, 나는 본과 3학년 실습학생이었다. 그 전까지 나는 새벽에 헬스클럽을 다녔는데 병원 실습이 시작되니 과마다 스케줄이 달라 정기적인 운동 시간을 확보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 무렵 마라톤이 유행하기 시작하여, 일산에 사는 나는 호수공원 마라톤클럽에 참여하기로 하였고, 주말이면 일산 호수공원을 비롯 다양한 달리기 코스를 개발해 뛰기 시작하였다. 운동이라는 게 한번 빠져들면 약간 중독이 되는 경향이 있어서인지 난 주말이면 몸 컨디션을 만들어 서너 시간씩 달리기 연습을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일요일 아침 6시에 호수공원에 나가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너무 불안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연습한 끝에, 나는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에게 시간은 중요하지 ..

펠로우 탐구생활

평범한 펠로우에게 박수를! 훌륭한 펠로우는 새벽일찍 일어나 환자파악 마쳐요. 주치의 없어도 회진도는데 전혀 문제 없어요. 아침에 보호자 warning도 다 해놓아 교수님 회진 도실 때 보호자들이 군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리게 만들어요. 평범한 펠로우는 밤새 뭔가 꼬물꼬물 하다가 늦잠자서 아침이면 허둥지둥이에요. 환자 파악한 것도 다 엉켜서 기억이 잘 안나요. 주치의들 자리 비우면 회진때 어물어물 교수님께 노티도 제대로 못해요. 상태 나빠진 환자 보호자들이 회진때 엄청 complain 해요. 교수님 회진 도실 때 기분 나빠져요. 훌륭한 펠로우는 교수님이 스터디 주시면 약속 날짜 어김없이 논문 다 써요. 교수님 코멘트 하시면 바로 회신해서 response 보여드려요. 그래서 교수님들이 좋아하세요. 항상 당당한 ..

Season 4는 가능할까?

영화 ‘매트릭스’를 꽤 여러 번 봤었다. 그 영화에 자꾸 시선이 갔던 것은 키아누 리브스가 잘 생겼다는 것도 한 이유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당연시하며 살아가는 지금의 세상이 어쩌면 가상현실일 수도 있다는, 어쩌면 나는 가상현실에서 실체가 아닌 채로, 가상현실의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기 않고 당연시하며 살아가는, 회로 속 배터리와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기분나쁜/기분 묘한 신비감이었던 것 같다. 과연 실체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이며 진실을 알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사회학을 공부할 때 나 스스로에게 요구했던 사고 방식은 세상에는 ‘take it for granted that’ 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질서가 있으므로 그 질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당연시 하는 것을 조금은 다르게 볼 줄 아는..

암 생존자로 다시 인생을 시작하는 후배에게

암 생존자가 되어 다시 인생을 시작하는 후배에게 인터넷으로 외국 서적을 검색하다 보면 ‘A Survivor's Guide for When Treatment Ends and the Rest of Your Life Begins’ 류의 책들이 많이 출판되고 있다. 암 생존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들을 위한 안내서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청이 높아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 같다. 아직 우리 의료 현실에서는 암 생존자에 대한 개념이 적극적으로 수용되지 않고 있는 터라,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지침서는 없고, 환우회나 동우회에서 환자들끼리 정보를 소통하는 정도로 자신이 개발한 노하우를 전달하며 끼리끼리 도움을 주고 받는 수준인 것 같다. 암 생존자(cancer survivor)라는 개념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

의료시스템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쓰면 좋아질 수 있고, 반드시 써야하는 약인데 쓰지 못하게, 쓸수 없게 하는 의료시스템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제발 ampho 좀 먼저 쓰라고 하지 마세요 모든 신약이 다 그런건 아니지만, 정말 획기적으로 좋은 약이 개발되어, 기존의 치료법을 뒤집는경우가 있다. ‘좋은 약’이란 대개 기존의 약보다 효능이 뛰어나거나 아니면 약의 부작용을 획기적으로 감소시키는 경우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런 ‘좋은 약’들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까지는 시간적 간극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 약을 사용하는 초기 단계에서는 해당 약제를 포함한 임상연구를 진행하거나 사용의 폭을 넓히거나 아니면 환자가 약에 대한 비용 부담을 전액 감당해야 한다. 더 이상 치료적 대안이 없어 의사가 마지막 카드처럼 ‘이 약이 보험은 안되지만 한번 ..

SCI 0점

아직도 나는 초심자의 마음인데… 전문의가 되면 최소한 해리슨에 있는 표나 그림은 머리속에 새겨져 있을 줄 알았다. 비록 내가 동기들보다, 혹은 절대적으로 나이가 많기는 해도, 전문의 시험을 무사히 통과할 정도의 실력이면, 최소한 내과 레지던트 4년을 ‘나름’ 열심히 보냈다고 한다면, 전문의가 되어 환자를 보는데 자신감도 붙고, 뭔가 창조적인 아이디어도 생기고 할 줄 알았다. 전문의만 되면… 그러나 현실을 역시 매정하다. 뭔가 불확실하게 알고 있던 절름발이 지식들이 산산조각이 나고, ‘선생님, 왜 꼭 그렇게 해야 하나요?’ 정확한 근거를 요구하는 후배 레지던트들 보기가 민망하다. 어느새 많이 멀어져 버린 내과 내 다른 분과의 세세한 지식들에 취약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주로 다루는 항암제의 기본적인 기전..

컴퓨터 의무기록의 시대, 환자 진료에 대한 단상

우리병원 전산 시스템은 여러 모로 편리한 점이 많은데, 그 중 하나가 쪽지 기능이다. 모니터를 앞에 두고 보자면 오른쪽 위 구석에 노란색 편지 봉투 아이콘이 있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쪽지를 보내면 그 노란봉투가 펼쳐졌다 닫혔다 하면서 깜빡깜빡 사인을 보낸다. 오전 회진이 끝날 무렵이면 파트별로 회진 정리를 하느라 모두들 전화가 불통인데, 이때 아주 급한 게 아니면 전달사항을 쪽지로 보낼 수 있다. 노란봉투를 클릭하면 보낼 사람 이름을 입력할 수 있는 창이 뜨고 이름을 선택한 후 엔터를 치면 쪽지창으로 전환되어 ‘마음껏’ 하고 싶은 말을 적어 보낼 수 있다. 일하다가 화면 오른쪽 구석에서 노란색 봉투가 반짝반짝 사인을 보내면 열어보게 마련이다. 일하다가 힘든 응급실 레지던트 ‘선생님, 목말라요. 응급실 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