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passion fatigue
오늘은 내 생일이다. 이제 누가 ‘생일 축하한다’고 말해줘도 뭔가 어색하고, 나이 먹는게 새삼 느껴져서 피하고 싶은 마음도 든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해 한해 반복되는 생일이 무섭기조차 하다. 무서운 이유는 이제 더이상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 두려운 게 점점 많아진다는 것, 의욕이 없어지고 뭘 봐도 무덤덤하다는 점이다. 내가 아직 이럴 때가 아닌데, 내가 원래 이렇지 않았는데, 자꾸 무덤덤해진다. 나라고 별 수 있겠어, 누가 뭘 잘 못해도, 나도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런 흐리멍텅한 생각만 든다. 이런 정신적 노쇠함이 나를 늙게 만드는 주범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레지던트 1년차 첫날 아침 prerounding을 돌며 떨려했던 바로 그 순간이 아직 생생한데, 역설적으로 지금의 나는 환자를 보는 것도 무덤덤하고 의욕도 없어지는 것 같다. 나의 지난 날을 무조건 반성한다고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지만 근간의 나를 냉철히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10년 20년 30년 같은 분야에서, 한결같이 환자를 보시는 선생님들은 과연 어떨까? 그분들도 지겨울 때가 있을텐데… 환자 보는게 싫고 환자가 미울 때가 있을텐데… 어쩌면 저렇게 한결같이 진료의 페이스를 유지하고, 임상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꾸준하게 정진할 수 있을까… 나는 못 그럴 것 같으니 진작에 될성싶은 떡잎은 아닌 것 같고 적절한 시점에 하산하는게 나나 환자 모두를 위해 나은게 아닐까? 앗, 너무 자조적으로 흐르는 것 같다…
오늘 아침 회진 중 본관과 암센터 사이 800m 남짓한 긴 복도를 걷는데 – 이 복도는 회진을 가이딩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참으로 부담스러운 거리다. 뭔가 선생님과 자연스러운 주제, 가능하면 학문적인 주제를 소재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는 부담을 갖게 하는데- 오늘은 선생님께서 먼저 말을 거신다. “Compassion fatigue라는 말 들어봤어요:?” 무슨 말인지 대충은 짐작이 되는데 무슨 일 있으신가?
“오늘 *** 환자가 응급실로 올 거에요. 오면 신경외과로 연락해서 감마나이프 수술을 먼저 하게 해주세요. 갑자기 경기(seizure)를 해서 뇌 MRI를 찍었더니 종양이 있었대요. 아마 폐암이 뇌로 전이된 상태에서 발견된 것 같아요.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남자인데, 벌써 결혼도 해서 애기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여기까지 말씀하시고는 한참 말씀이 없으시다. “참 너무 한 것 같죠?”
선생님은 아주 서글서글한 외모로 환자들에게 인기가 많으시다. 환자에게 병의 경과와 앞으로 예후 등에 대해서 소상히, 그렇지만 환자의 마음 부담스럽지 않게 설명하신다. 암환자 진료가 그렇게 밝은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둡지 않게, 긍정적으로, 늘 다른 대안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은연중에 풍기시기 때문에 환자들이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 선생님도 어떤 상황이 되면 지치시는지 얼굴 표정이 공허해진다.
다른 선생님께 여쭤본다. “선생님은 너무 안타까운 환자들, 말 안듣는 환자들, 의사의 치료 의지를꺾어버리는 환자들을 보고 속상해서 지칠 때가 있으신가요? 그럴 때는 어떻게 탈출구를 찾으시나요?” 선생님은 의외로 단호하게 답을 주신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예전에 BMT(골수이식) 환자 볼때는 정말 나도 너무 괴로워서 다리 쭉 펴고 자본 적이 없다니까요. 지금처럼 fellow들이 내 밑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다 알아서 봐야 했죠. 별로 좋은 약도 없던 시절이라 혈액종양내과 의사가 할 수 있는게 별로 없으니까, 일요일도 안 쉬고 아침 저녁으로 회진돌고 환자보고 설명하고, 나쁜 환자 중환자실 가면 옆에서 지키고…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훨씬 나아졌어요. 일요일에는 절대 병원에 안 올려고 해요. 그때 확실히 쉬어야죠.” 교회에서 성가대를 하신다는 선생님은 종교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으신다고 했다. 종교적 심성이 약한 나는 그런 방법을 택하기에 좀더 수련이 필요하다.
예전 선생님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신 분도 있었다. “그런 마음은 다른 환자를 만나면 풀려요. 모든 환자들이 다 그런게 아니니까요. 환자랑 문제를 토론하고 해결 방법을 찾고, 그리고 나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 힘을 얻고 고마워하는 환자를 보면, 나도 힘이 나고 새로운 에너지를 찾게 되요. 결국 그런 문제의 해답은 환자가 함께 하는 과정에서 얻게 됩니다.”
Compassion fatigue라는 말은 동정심 피로증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스트레스를 이해하게 될 때 자발적으로 도덕적 감정이 분출되지만, 현대적 일상의 취약함으로 이러한 감정이 소모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상에 대한 공감의 능력과 열정이 조금씩 깎여나가고 약화되는 것을 지칭한다. 이런 증상은 무기력해지고, 삶의 즐거움을 점점 못 느끼게 되며 지속적인 스트레스와 불안감,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고 내가 의사가 되고 나서 반복적으로 경험했던 익숙한 느낌인것 같다. 힘들고 병약한 환자들을 보며, 나는 의사로서 뭔가를 적극적으로 해보고 싶었는데 잘 되지 않고, 시스템에 문제가 있거나 혹은 내 능력이 부족하여 문제 상황이 해결되지 않은 채 반복되는 와중에 내 마음의 열정과 성의가 사그라져 버릴 때, 그래서 우리가 흔히 burn out 되버렸다고 말하는 바로 그런 증상인 것 같다. 한 명의 환자를 볼 때는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 내가 뭔가 최선을 다해서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느끼지만, 그런 환자의 숫자가 급속히 증가하게 되면 점점 무덤덤해지고 가슴아파하지 않게 되는 것이리라.
내가 burn out 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때, 주위 동료가 그런 느낌으로 의욕을 잃고 힘들어할 때, 그런 소모적이고 허무한 감정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긍정의 마인드를 어디서부터 다시 얻을 수 있을까?
Compassion fatigue는 의료직 종사가 특히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에게 보다 자주 생기는 증상이라고 하는데, 이는 환자에게 매우 직접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어떻게든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
환자 한명 한명을 가족처럼 아끼고 돌본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늘 그런 식으로 진료하다간 정말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해버릴 것이다. 반면 자신의 감정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 너무 거리를 두면 환자와 너무 차갑고 딱딱한 관계만이 형성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간 적절한 관계유지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적당한 거리두기일지 모르겠다. 좀 썰렁하게 느껴지겠지만 거리를 두고, 그러나 마음 속에서 따뜻한 애정을 품고 있을 때 오래 가는 사람이 되겠지?
'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 펠로우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콩 화장품 임상시험에 참여하며 (0) | 2011.02.27 |
---|---|
진단서를 작성하며 (0) | 2011.02.27 |
외모도 중요한 젊은 암환자들 (0) | 2011.02.27 |
응급실에서 병실 배정을 논할 때 (0) | 2011.02.27 |
Painful Memory Again (0) | 2011.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