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펠로우일기

진단서를 작성하며

슬기엄마 2011. 2. 27. 11:20

진단서

 

내 이름으로 외래를 처음 개설하기 전날밤, 얼마나 설레었던가! 명실상부한 전문의가 된 기분이었다. 외래는 입원환자 보는 것과는 다르니 환자를 보면서 당황하지 않도록 미리 예습을 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으로 EMR을 열었다. , 왠 진단서 발급을 요청하는 사람이 이리 많은고?

정작 외래에는 환자가 아닌 보험회사 직원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고 보험회사마다 다양한 형식의 진단서, 진료확인서, 소견서를 요구하고 있었다. 보험 회사에서 요청하는 정보는 여러 모로 다양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수술 후 암세포가 확인되었는지, 병기와 현재 상태는 어떠한지, 치료 방법은 입원인지 외래인지, 입원이라면 낮병원인지 아닌지, 치료 약제는 무엇이었으며 주기는 얼마 간격인지, 치료를 중단하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항암 및 방사선치료의 목적은 무엇인지, 항암치료 기간 중 환자의 상태는 일상생활을 영휘하는 것이 가능했는지 등의 정보를 요청한다. 여기까지는 귀찮지만 예전 기록을 찾아서 요청하는 대로 작성해줄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다음의 질문들은 나를 욱하게 만든다.

퇴원 당시 환자 상태를 고려할 때, 퇴원 후에도 추가로 입원치료가 필요합니까? 아니면 통원치료만으로도 가능합니까? 만일 추가입원이 필요했다면 그 의학적 소견을 언급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추가입원이 필요하다면, 예상할 수 있는 적정 입원기간은 어느 정도 입니까?”

귀원에서의 치료 외 추가적인 입원치료가 반드시 필요했나요? 필요하다면 그 사유가 무엇입니까?”

상기 병명의 발병 요인이 무엇이며 판단근거와 위험인자를 기재해주십시오

항암치료를 통원으로 시행하였다면 총 통원치료의 횟수를 기재해주십시오

항암치료로 힘든 환자들, 몸과 마음이 지친 그들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더라도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고 착하게 마음먹곤 하지만, 왠지 이들 진단서의 문장을 읽다보면 점점 뭔가 마음 속에서 울컥하는 것을 느낀다.

암보험은 건강보험 못지 않게 이미 민간보험의 형태로 전국민을 아우르고 있는 것 같다. 보험 약관마다 보장해주는 범위가 다르기 때문에 약관을 잘 모르던 환자들도 환자들간의 정보 교환을 통해 꼬박꼬박 보험료를 신청하고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항목이 있다면 더 꼼꼼히 챙기고 있다.  당연한 시장행위이다. 입원을 하면 보험료가 나오는데 외래에서 시행하는 항암치료는 혜택을 받을 수 없으니, 환자들은 거주지 병의원에서 입원하며 항암치료를 받는 경우가 많다. 요양원에 있는 것도 입원처리가 되는 보험이 있어 그들은 늘 진단서를 요청하고, 보험회사 직원은 진료실에 찾아와 이 환자가 꼭 입원을 해야하는 상황인지를 나에게 묻는 것이다. 이것도 당연한 시장행위라고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내가 보험에 가입하여 돈을 지불한만큼 혜택을 다 챙기는 것은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

항암치료라는 것이 원래 편한 치료가 아니고 치료 중간 즈음에는 면역성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기운, 식욕도 없고 감염의 위험이 높은 시기라 환자 입장에서는 집보다 병원이나 요양원에 있는 것을 더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뭐라 한마디로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마음 속에서는 Moral hazard를 우려하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항암제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외래에서 통원치료가 가능하도록 치료방법이 변화하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견딜 수 있도록 보조 약제들이 많이 개발되기도 했고, 병원감염에 따른 2차 위험을 낮출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물론 외래 항암치료의 이면에는 병원에 장기입원자가 많을수록 병원내 감염이나 합병증이 증가하고 병상회전율이 떨어지면서 궁극적으로는 병원 재정에 도움이 안된다는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보험회사에서 요청하는 무식한 질문-의학적으로 답변하기 어려운-에도 화가 나지만 환자 진료 중에 맥이 끊기면서 진료의 집중도가 순식간에 확 떨어지는 것이 더 화가 난다. 다음 환자 진료가 지연되지 않으려면 매우 빠른 속도로 환자 파악을 하고 진단서를 써야 한다. 무심코 쓴 진단서 한장, 문장 한줄이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소홀히 해서도 안된다. 그래서 진단서를 요청하는 보험회사 직원들이 진료실에 들어오면 신경이 극도록 날카로워진다. 그들에게 화를 내거나 문제제기를 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과연 암환자들이 가입한 민간보험은 이들에게 경제적, 정신적인 도움을 주고 있는가? 민간보험을 통한 진료지원이 암환자의 Quality Care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 가입자들이 지불하고 있는 보험료와 실재 보험회사에서 환자에게 지급하고 있는 진료비는 어느 정도인지, 이러한 민간보험의 존재가 암환자에게 어느 정도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는지, 이러한 제도가 존재함으로써 의료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겠지만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외래를 보는 내내 이런 질문들이 내 머리속을 맴돌지만 어떻게 이를 증명할 수 있을지 방법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솔직히 이런 거시적 명제를 떠올리며 열받는다기 보다는, ‘내가 이 귀중한 시간에 환자를 보지도 않은채, 환자의 안녕을 고민하지 않고, 진단서 형식에서 요구하는 관련 정보를 찾기 위해 시간을 소모해야 하는가에 열받는 측면이 더 강하다. 단지 만원짜리 진단서 한장에 말이다. 진료실에서 순간순간 느끼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분노의 기저에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많은 의사들이 비슷한 분노를 느끼면서도 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것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