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펠로우일기

콩 화장품 임상시험에 참여하며

슬기엄마 2011. 2. 27. 11:21

콩 화장품 임상시험에 참여하며

 

명단에 뜨는 할머니 나이는 만 70세인데 실재 나이는 74세라고 하셨다. 빈말 아니고 할머니는 60세 정도로 보인다고 말씀드리니 정말 좋아하신다. 특히 피부가 진짜 좋으시다고 하니 내가 이나이에도 여자라고 일주일에 팩을 3번은 해요.’라며 자기관리의 정수를 보여주신다.

 

처음 위암을 진단받으셨는데, 대동맥 주위로 림프절 전이가 있어서 수술이 어려운 병기로 진단받으셨다. 원격 전이는 없으시지만, 병기 분류체계에 의하면 4기 위암으로 진단되신 셈이다. 사진을 보는 순간 정말 아까웠고 아주 원칙적인 판단은 아니지만 항암치료를 해서 효과가 좋으면 나중에 수술을 고려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욕심이 들었다.

환자에게 처음부터 너무 많은 불안과 절망을 주어서도 안되지만 과하게 희망을 갖게 해서도 안되니 말을 조심해야 했고, 그래도 난 끝내 희망을 드리고 싶어서, ‘흔한 일은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 항암치료의 반응을 보고 수술을 고려해 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둘러둘러 표현하고 말았다.

의외로 쿨한 할머니 반응.

의사선생님께서 좋은 약으로 알아서 잘 해주세요. 지가 살라면 약도 효과좋고 수술할 수 있을 것이고, 지가 죽을라면 죽기밖에 더하겠어요. 살만큼 살았으니 미련없어요. 사는 동안 편히 살게 해주세요.’ 당신도 여자라며 일주일에 세번 팩을 할만큼 자기 관리가 철저하신 분 같은데 막상 진단명과 예후를 고지하는 데도 별로 충격을 받지 않으시는 것 같다. 수술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보이시지 않는다. ‘할머니라 이해를 잘 못하신건가?’ 그러고 보니 검사가 조금 지연되어도 회진을 가서 검사 진행사항에 대해서 별 설명을 안드려도 그런가보다하며 처음 하는 병원생활을 잘 버티고 계신다. 전신 관절이 돌아가면서 아프시다고 하여 류마티스 관련 피검사를 하고 협진을 보려고 했더니 자기 평생 왔다갔다 하면서 아팠던 거니까 지금 새삼스럽게 검사안했으면 좋겠다며 싫어하시는 정도의 불평을 보이셨다. 그래도 엉덩이 관절이 벌겋고 통증도 있으시다길래 우겨서 초음파를 했더니 Bursitis 였다. 항생제나 진통제를 굳이 쓸 필요는 없는 정도. 결국 할머니 말대로 추가적인 검사를 진행하지 않고 멈췄다. 일단 4기 위암에 대한 치료와 반응이 더 걱정되는 상황이므로, 아직 큰 불편감이 없는 만성질환까지 몽땅 다 검사하기에는 무리인 것 같았다.

할머니는 1차 항암치료를 아무런 부작용없이 마치고 약이 끝나자마자 휭 하고 퇴원하셨다. 머리가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씀드리니 그럼 더 빠지기 전에 빨리 가발 맞추고 준비해놔야 겠다며그리고 다음 항암치료 전 수치가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기간에 외래에 한번 오시게 했는데, 크게 수치 변화도 없으시고 할머니도 멀쩡하게 나타나셨다. 입이 약간 헐었지만 그거 말고 힘든 거 없다고. , 이 할머니 대단하신데!

 

2차 항암치료를 위해 입원하시던 날, 수치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뽀얀 할머니 피부는 여전하셨다. 머리는 미리 다 밀고 오셨다. 가발은 왜 안쓰고 오셨나고 여쭤보니, 여기오면 다 똑같은데 뭐 귀찮게 가발쓰겠냐며, 밖에서는 좀 어색하니까 가발을 쓰시는거라고 호탕하게 말씀하신다. 할머니는 항암치료하니까 피부가 더 좋아지는 것 같다는 나의 농담에 정색을 하시면서 나에게 한마디 하신다.

나 청국장 먹고 피부 진짜 좋아진 거에요. 선생님도 한번 잡숴봐. 청국장 먹고 청국장 팩 보름만 해보면 내 말 믿을거야. 내가 먹는 청국장 한번 먹어볼텨?’ 나는 오후 회진 중에 옆에 레지던트가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순간 이성을 잃고 , 내일 꼭 갔다 주세요. 저도 꼭 먹어보고 싶어요부탁드렸다. 난 최근 2년동안 얼굴에 뾰루지도 많이 나고 자꾸 손대서 성도 많이 나서 얼굴 군데군데가 얼룩덜룩 엉망이었으며 그게 내심 컴플렉스였는데, 피부과나 피부관리실을 따로 가지 않고 청국장 팩을 2주 해보는게 뭐 대수겠냐, 먹으면 몸에 좋은 청국장, 피부에 바른다고 별일 있겠어? 싶은 마음에 냉큼 환자의 촌지 제안을 받아들였다. 심지어 적극적으로 부탁드렸다.

그 자리에서는 우리는 피부에 신경쓰는, 어쩔 수 없는 여자들이라며 환자랑 한참을 크게 웃었는데, 병실을 나와 생각해보니 의사인 나는 참 어이없고 환자인 할머니는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수술 못하는 위암을 진단받은지 얼마 안된 환자가 회진도는 의사 얼굴을 보며 뾰루지 치료해주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다니, 환자가 정말 낙천적이고 고맙고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소 반골기질이 있는 나로서는 세상의 많은 일에 뚱하고 딴지걸고 비관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에 익숙해 있는 편인데 이렇게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부끄럽고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하간 난 오늘을 기다렸고 교수님과 함께 도는 아침 회진 때는 아무 말씀없으신 할머니, 회진을 돌고 방을 나서는데 나한테 이따 보자는 식의 눈짓을 하신다. 나도 ‘OK’ 사인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오후 회진. 할머니만 계신게 아니라 아들도 자리에 함께 계신다. 그리고 나를 줄려고 준비한 것이 분명한 큼지막한 종이봉투가 침대곁에 놓여있다. 첫 입원 때 면담하면서 아드님이 자신은 농부이고 유기농 콩 재배를 하고 계신데 건강에 좋은 품종을 개발하느라 박사급 연구원을 고용하며 랩이랑 농장을 운영하고 계신다는 걸 들은 기억이 난다. 내가 위암 임상연구 운운할 때 쉽게 이해하셨다. 본인도 임상연구까지는 아니어도 실험결과를 바탕으로 한 연구를 진행하며 품종을 개발하고 계신다 했다. 어머니가 최근 3년 이상 드셨다는 청국장도 아드님이 재배한 콩으로 만든거라 하셨다.

아들은 청국장 가루를 종류별로 몇가지 보여주셨고, 환 형태로 조제된 것, 농축 액기스 형태의 팩, 심지어 최근에 시험을 마쳤다며 콩 성분으로 만든 화장품도 가져오셨다. 아직 제품화된 것은 아니라며, 그래서 미심쩍으면 안써도 된다며, 근데 자기 가족들이 다 먹고 바르고 써봤는데 아주 효과가 좋은 것 같다며, 화장품도 한꾸러미 안겨주신다.

나는 입원실 내에 다른 환자들도 있는데 이런 촌지 선물을 덥석 받은 셈이 되어 민망스러웠지만, 나를 위해 청국장 복용법, 화장품 사용법을 일일히 적어오신 정성이 고맙고, 나를 직접 전해주고 설명해주고 싶어서 일터로 돌아가지 않고 늦은 오후 회진까지 남아서 날 기다려준 아드님이 고마웠다. 환자는 자기가 3차 치료하러 들어오면 CT 찍고 좋아지는 모습 보여줄 테니, 나한테도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마사지 열심히 하고 팩도 열심히 하고 식생활도 청국장 중심으로 바꿔서 예쁜 얼굴, 고운 피부를 만들어 놓으라고 당부하신다.

 

오늘 하루동안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던 여러 잡스러운 일들을 다 잊고, 할머니께 감사드리며 하루를 마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의사이기 때문에 이런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이 직업 너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콩 화장품 1상 임상연구에 참여하는 영광을 주신 할머니!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열심히 피부관리할 테니 할머니도 꼭 좋아져서 오셔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