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죽음을 준비하는 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가족을 치료하는 것

슬기엄마 2011. 12. 15. 23:35


92세 외할머니가 폐암 뼈전이를 진단받으셨다.
전신 통증이 너무 심해 근처 병원에 갔다가 다발성 골절이 발견되어 여러 검사를 하셨고 폐암의 뼈전이가 그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통증이 심해 밤에 잠을 잘 못 주무셔서 입원이 필요할 정도였다.
암환자의 통증 조절. 그건 나의 전공이니까 내 환자로 입원하기로 하였다.
할머니는 본인이 암이라는 걸 모르신 채 손녀가 있는 병원이니까 입원하신 걸로 알고 계신다.
척추 갈비뼈 여기저기 전이가 되어 있고 폐에 물도 고이기 시작한다.
언제 생긴 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앞으로 얼마 안남으신것 같다. 전이 정도도 심하고 늑막에 물도 차기 시작하는 걸 보니, 곧 숨도 차실 것 같다.
가족들은 조직검사나 항암치료를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암이라는 사실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내가 늘 만나는 가족들의 모습과 비슷하구나... 가족은 한번에 설득하기 힘드니까 일단 진통제로 통증을 조절하면서 조금 더 경과를 보기로 했다. 

몇가지 약제 조합으로 통증 조절이 잘 되었다.
척추의 압박골절에 대해 예방적으로 어떤 시술을 하는게 좋을지 말지 신경외과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골다공증이 심하시니 거기에 대한 약도 드렸다.

할머니 청진을 하고
등도 두드려보고
통증 점수도 아침 저녁으로 물어보면서 진찰을 하는데
너무 작고 야윈 몸, 아직 초롱초롱한 정신, 그런 걸 직접 느끼니 새삼 마음이 아프다.

내가 어렸을 적 학교 갔다 돌아왔는데 집에 엄마 없으면 할머니 집으로 가서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열무김치 비빔밥 먹던 기억, 그렇게 할머니 집에 가면 천원짜리 한장 손에 쥐어주며 과자 사먹으라고 돈 주시니 그 맛에 틈만 나면 할머니 집으로 쫒아갔던 기억, 외할아버지가 벌여놓은 일 뒤치닥거리하면서 노인네가 어음막고 돈계산하여 일처리하는 것에 놀랐던 기억, 우리 가족에서 외할머니는 총 대장이었다. 어찌나 총명하고 유머감각이 뛰어나신지, 그 생활력은 어찌나 강하신지, 온 가족이 외할머니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20년이 넘게 외갓집은 온 가족이 여름휴가를 같이 맞춰서 여행도 다니셨다. 왠만하면 아픈 내색없이 평생 지내시던 분이, 이번처럼 아픈 것은 처음이라고 하셨다. 조절되지 않는 암성통증이니 당연하다.

외할머니랑 도란도란 얘기하며 지낸 것도 아주 오래된 일인데,
이제 이렇게 마지막 가시는 길에 내가 가진 능력으로 효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가족이 한꺼번에 모이지 않으니, 내 설명을 파편적으로 전달되고
누구나 나에게 다시 한번 설명을 듣기를 원했다.
평소에 친척들을 잘 만나지 않고 지냈던 나로서는 이번 기회에 점수를 딸 수 있는 좋은 기회지만
나에게는 다른 환자도 많았고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난 그런 외갓집 식구들의 요구를 다 수용하지 못한채 내 방식대로 면담을 했고
이런 나의 태도때문에 섭섭함을 느끼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내 환자는 할머니만 있는건 아니니까.

할머니 연세가 아주 많으시니
아주 당황스럽거나 아주아주 슬프지는 않았다.
암환자에게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예상치 못했던 사건들, 그것들이 할머니에게도 찾아 올 것이다.
남들보다는 담담하겠지만, 그래도 그 고통을 이미 아는 나로서는 벌써부터 안타까울 따름이다. 

엄마가 할머니에게 묻는다.
'엄마, 엄마도 죽는게 무서워?'
'응, 솔직히 무서워.'
'하느님 믿는다는 사람이 뭐 그래. 잘 살다가 하느님께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지.'
'내가 죄가 많아서 하느님 앞에나 가기나 하겠냐?'
(할머니는 외삼촌이 먼저 돌아가시게 된 것을 당신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신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다 죄인이지. 그래도 우리 죄를 다 용서해주니까 천당갈 수 있다고 생각해.'
'천당은 무슨...'

할머니의 남은 삶의 시간이 고통스럽지 않도록, 좋은 마음으로 지내실 수 있도록 해야겠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 외래를 보니, 매 환자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울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