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펠로우일기

선생님의 가운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나?

슬기엄마 2011. 2. 27. 11:29

선생님의 가운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나?

 

의사 가운도 패션시대. 우리에게 익숙한, 빳빳하게 풀을 먹인 흰색가운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스타일을 넘어, 은은한 파스텔 톤의 맵시있는 쟈켓 형태나, 세련된 셔츠 형태로 가볍게 변형시킨 여름 가운들도 선 보인다. 내가 세브란스 병원 레지던트로 일할 때는 무릎 위 정도의 길이로 된 긴 가운을 입었고 교수님이나 임상강사들은 자켓처럼 짧은 가운을 입었기 때문에, 멀리서 짧은 흰 자켓이 보이면 , 높은 선생님들인가보다알 수 있었다. 몸에 딱 붙는 맵시있는 짧은 가운이 꽤 부러워 보였다. 나도 전문의가 되면 저렇게 폼 나는 가운을 입을 수 있겠구나

아쉽게도 지금 일하는 삼서서울병원은 전공의나 교수님이나 임상연구센터 연구원이나 다 같은 스타일의 가운을 입으니 폼 잡을 일 없어져서 서운하다(!). 펠로우가 되어 이곳 병원에 처음 들어 왔을 때 의사들의 가운에 대한 첫 이미지는 전체적인 가운의 폭이 너무 넓고 길이도 길며 팔 소매의 통도 너무 넓어 펄럭거리는것처럼 느꼈고 왠지 복장이 세련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가운을 입고 걸어가다가 반대쪽 유리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고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운을 폼 나게 입을 것이냐, 효율적으로 입을 것이냐

 

어느 날 문득 주머니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한 교수님의 호주머니가 눈에 띄었다. 키도 별로 크지 않고 날씬하지도 않으신 선생님의 가운 호주머니에는 두툼하고도 오래되어 보이는 다이어리, fever , 그리고 오래된 듯한 무슨 guidebook이 한꺼번에 포개져 있어 있다. 회진에 집중되지 않고 자꾸 호주머니에 눈이 간다. 다이어리는 무척 오래되어 손때가 잔뜩 묻어있었고, 전공의 1,2년차 주치의 시절에 항생제를 잘 선택하지 못해 몇번이고 들여다 보던 fever 2009년 판에도 포스트 잇으로 뭔가를 표시해 두셨다. 협진이 나서 선생님께 보고를 드리니 어색한 듯 씩 웃으시면서 나도 이제 기억이 잘 안나서…’ 라시면 내가 그렇게 궁금해 하던 다이어리를 꺼내 뒤적이신다. 선생님이 지금 자주 보시지 않는 병들도 다이어리 여기 저기에 정리되어 있었다. 맘 먹고 정리하신 듯 컴퓨터로 정리해서 작게 출력해서 붙인 것 같은 표, 저널을 잘라 붙인 듯 한 그림, 급하게 받아 적어둔 낯선 lab 들이 잔쯕 다이어리 속지에 숨어있다.

나는 선생님의 다이어리를 훔쳐 보는 순간,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나도 다이어리를 사야지! 공부하면서 조금씩 정리하고 차곡차곡 그 지식들을 쌓아 나가다보면 나도 실력이 쑥쑥 자랄거야나는 그 강렬한 느낌을 조금이라도 미룰 수 없어 당장 병원을 뛰쳐나가 근처의 큰 문방구로 향했다. 주치의 것도 하나 더 샀다. ‘우리 같이 열심히 공부하자

 

Physical exma은 전공의 1년차 때 열심히 해 본 exam만 하게 되는 것 같다. 1년차 시절, 어느 당직을 서던 밤 나는 열 나는 환자의 focus를 뒤지다가 환자의 심장 뒤에서 아주 국소적으로 바그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폐렴을 진단했을 때 느겼던 희열! 그 뒤로 나는 항상 심장 뒤 청진을 열심히 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솔직히 neurologic exam은 약하다. 학생 실습 때 시험 본 뒤로 별로 열심히 하지 않았다. 발바닥을 긁으며 Barbinski sign을 찾지도 않았고 crainial nerve sign인지 spinal root sign인지 cerebral sign인지 뭐 그런 건 신경과에 협진내서 exam 해달라고 하자는 안이한 생각을 가지고 살았나 보다. (내과 전문의가 되어 이런 고백을 하게 되니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전신 어디서나 문제가 발생하는 암환자를 보게 되니 나의 취약한 physical exam 실력이 몽땅 들통난다. 지금 내가 돌고 있는 파트의 교수님 호주머니에는 penlight, hammer는 기본이고 tongue pressor, 면봉을 비롯해 opthalmoscopy까지 들어있다. ‘아니 내과 의사가 opthalmoscopy를 볼 줄 모른다는 말이니? 한심하다 한심해하시며 입으로는 우리를 꾸짖고 당신의 눈과 손으로는 환자를 진찰하신다.  비좁을 응급실에서도 어지러워하는 환자를 앉히고 걸리고 두드리면서 진찰하시고 papil edema도 당신 눈으로 직접 확인하신다. ‘지난 번 MRI사진 찍은지 며칠이나 됬다고, exam 해보면 아는 걸 그렇게 무턱대고 MRI만 찍어대니?’라고 호통을 치시면 할말 없어진다. 한쪽 호주머니는 일정이 빼곡한 두툼한 수첩이, 다른 한쪽 호주머니에는 opthalmoscopy와 해머 등 각종 physical exam용 도구들이 들어있다. 나도 opthalmoscopy 사야하나?

 

뼈로 암이 전이된 환자의 뼈사진을 다시 찍었다. 환자가 통증이 있다고 말하는 부위가 더 까매진걸 보며 , 병이 진행했나 보다나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내 마음을 다 읽으신 듯, 교수님은 당신 수첩을 꺼내 속지가 보이지 않게 살짝 가리며 ‘(병원 등록번호) ****-**** 사진 좀 띄워보세요. 이 사람도 항암치료 후 일시적으로 uptake가 증가해 보이지만 이런 현상이 반드시 병의 진행을 의미하는게 아니에요. 이런 걸 가리켜 **** 현상이라고 하는 겁니다나는 고개를 쑥 빼내어 선생님의 수첩을 홈쳐보지만 나로서는 알수 없는 숫자들만 잔쯕 적혀있다. 아마 선생님만 아는 암호체계로 환자들의 ID를 정리해 두신 것 같다. ‘훔여보지 마세요. 제 재산이에요라며 수첩을 덥으며 농담하시지만, 아마도 그 수첩은 선생님의 아이디어로 똘똘 뭉쳐진 액기스 메모집일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나는 가운을 깨끗하게 입지도 않고, 날씬하지도 않아 맵시도 없고, 호주머니에는 이것저것 잡동사니가 들어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라, 얼굴 값을 하라는 말이 있는데 아마도 그 사람의 사람됨과 삶의 철학이 얼굴에 드러나기 때문인 것 같다. 가운을 보면 의사로서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말은 없다. 실력이 출중한 의사의 가운 호주머니에 우아한 펜 한자루만 들어있는 경우도 있다. 외모가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니 일반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니어 교수님들께서 손수 physical exam을 하면서 사진에서 간과되었던 사실을 발견해내시고, 당신의 환자들에게서 발생하는 이상한, 설명이 어려운 일들을 기록해두고 학문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니 피래미 전문의가 잔뜩 긴장된다. ‘나도 성의껏 한다고 하는데 너무 허술하고 엉망이구나

당분간 맵시보다는 기능성을 충분히 살린 가운을 입고 두꺼비처럼 호주머니를 부풀려 비상지식의 보고를 채워가지고 다녀야겠다. 흥분해서 샀다가 얼마 정리 못하고 책상 구석에서 뒹굴거리고 있는 다이어리를 다시 정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