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펠로우일기

학회에서 '꼼수'를 나누는 교수님들

슬기엄마 2011. 2. 27. 11:30

 

난 학회에 가면 구석에 숨어 열심히 필기하고 강의를 듣는 편에 속한다. 교수님들은 잘 모르더라도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시지만, 질문도 실력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질문 제대로 못했다가 바보되는 거 많이 봤다. 아직은 구석에 찌그러져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내 수준에 맞다고 생각하니 하루 빨리 플로어에 나가 당당하게 질문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얼마 전 학회에 갔다가 뒤에 앉았더니 집중도 잘 안되고 화면이 잘 보이지도 않아서 제일 앞줄로 나가서 강의를 듣기로 했다. 앞에 앉으니 강의를 하시는 선생님들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나야 종양학을 공부하겠다고 입문한지 2년째에 불과한 강사 신분. 선생님들 강의를 듣기만 하고 멀찌감치서 뵙던 분들이라 개인적으로 안면없이 익명으로 인사만 하는 관계였으니 선생님들도 내 존재를 별로 의식하지 않으시고 이얘기 저얘기 하시는 걸 옆에서 훔쳐들을 수 있었다.

 

선생님, 제가 여차저차한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데요, 반응은 좋은데 이 약을 언제까지 쓰는게 좋을까요? 이렇게 쓰면 보험에서 문제는 없을까요?”

글쎄요, 저는 몇 년까지 써봤어요. *** 연구에서 데이터가 있으니까 근거는 있는 셈이에요. 그런데 저도 너무 오래쓰는 것 같아서 끊었더니 금방 재발하더라구요. 그런데 또 다시 썼더니 좋아졌어요. 보험으로 쓸려면 심평원에 서류를 좀 많이 써야 할거에요.”

 

선생님, 이 약을 이러이러한 경우에 쓰는게 보험이 안되는건가요? 절 얼마전에 삭감 당했다고 통보받았어요. 환자는 치료가 잘 되고 있는 중인데, 삭감 당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환자는 비급여라도 쓰겠다고 하는데, 그러면 불법진료라는 거 아닌가요?”

아니에요. 소견서에 이러이러한 내용을 쓰면 통과시켜주는 것 같아요. 저도 비슷한 케이스가 있었는데 삭감 안당했어요. 그럴 때 한 6개월 계속 소견서쓰면 통과되기도 해요”“

 

선생님은 이러이러한 환자 보신 적 있으세요? 제게 지금 이런 환자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어요. 일단 저러저러한 치료를 하면서 경과를 보고 있는데, 별로 치료효과가 없는 것 같아서 고민이에요. 환자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특별히 시도해 볼만한 약제조합이 없는데…”

그럴 땐 현재 약제가 독성이 심해서 쓸 수 없는 것처럼 의무기록을 남기시고 다음 약으로 무슨 약을 쓰는게 보험으로 삭감이 안되고 쓸 수 있어요. 3주기 하고 CT찍어서 어찌어찌 평가를 꼭 하셔야 해요.”

 

선생님들은 학회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쉼없이 환자들 케이스를 서로에게 털어놓으며 의견을 구하고 계셨다. 서로 노하우를 알려주고 꽁수도 알려주며 의견 교환에 한창이시다. 나 같은 피래미가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기만 했던 선생님들, 그들의 유창한 강의만큼, 유수의 대학 병원에서 자기 분야의 전문가인 만큼, 환자 진료에도 거칠 것 없이 척척이신줄 줄 알았는데, 그들의 유창한 강의만큼이나 환자를 보는 과정에서도 거칠 것 없는 분들인 줄 알았는데, 너무 솔직하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털어놓으며 고민하고, 서로에게 질문하시는 모습을 옆에서 보니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아니, 고명하신 선생님들께서 이렇게 모르시는게 많았단 말인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암환자를 본다는게 쉬운 일이 아니며, 교과서나 논문에서 제시하는 도식화된 지식, 표준적인 방식만으로는 환자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특성과 병의 특징을 고려한 진료를 할 수 없다는 고전적인 의료의 명제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기도 한다.

 

정말 너무한거 아닌가요?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치료도 치료지만 심평원 심사 피해가기, 보험으로 청구하기 등 비보험, 임의비급여, 100:100 등 진료비와 관련된 문제가 주를 이루고 의료보험 적용을 가능하게 하도록 서류 작성하기 등등의 노하우를 공유하는 것이 그들 대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소곤소곤 상의를 하시는 선생님들이 얼마전 유방암에서 특정 표적치료제를 사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수개월 자료를 준비하시고, 근거를 만들어 심평원에 제출했던 파일을 받아본 적이 있었다. 유방암 환자에서 이 약제를 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과연 얼마나 실질적인 이득을 기대할 수 있는지, 예상되는 환자 수와 비용은 얼마나 발생할 것인지 등등에 대해 외국의 문헌과 한국의 현실을 고려하여 자료를 만드셨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요즘처럼 개인의 업적이 생존전략의 핵심을 차지하는 시대에, 내 업적에 도움 안되고 잔뜩 준비했다가도 승인 안되면 모든 공든 노력이 무화되어 버릴 수 있는 건강보험공단 관련 서류작업을 하면서, 과학적이고 충분한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꼼꼼히 서류작업을 준비하시고 끝내 보험 승인을 받아내신 걸 보니, 이분들이 정말 대단하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녕 환자들은 모르겠지만

발표를 위해 몇일밤을 세워 준비하셨을 파일도 선뜻 메일로 보내주신다고 한다. 발표용 파일을 하나 만들 때마다 느끼지만, 정말 사소한 디자인을 하나 수정하기 위해서 마우스를 몇번이나 반복하며 클릭을 해야 했던가! 한 페이지에 들어갔으면 싶은, 내 마음에 꼭 드는 그림을 하나 찾기위해서 구글 이미지를 얼마나 뒤져야 했던가! 내용도 내용이지만, 표 만들고 그림 그리는데 참으로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런 파일을 누군가가 달라고 하면 솔직히 마음 속으로 아깝다는 생각이 들던데… ‘너는 고생안하고 공짜로 먹으려 하다니!’라는 속좁은 마음이 든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바이다. 그런데 선생님들은 서로서로 메일로 보내주고 자료를 공유하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으셨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는 공부라는게, 내가 환자를 본다는게 결국 나 혼자 힘만으로는 결코 잘 굴러갈 수 있는게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가시적인 성과가 아니어도, 온전히 나의 것이 되지 않아도, 환자를 위해 의논하고 노력을 함께 하는 선생님들이 정말 멋지다는 느낌을 받게 되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번 학회에서 좋은 걸 얻었다. 이 마음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