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펠로우일기

나를 위한 기도

슬기엄마 2011. 2. 27. 11:29

나를 위한 기도

 

나는 천주교 신자이다. 그러나 믿음이 아주 깊지도 않고 성당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며 내 생활 자체가 종교성이 강하지도 않다. (하느님, 죄송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주말미사를 참석하는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신자의 의무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난 사실 지난 8개월 동안 주말미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심지어 12월에는 성탄미사도 안 봤는데, 안 봤다고 해서 마음이 아주 괴롭거나 몹쓸 짓을 했다는 죄책감도 크게 심하지 않다. (하느님, 정말 죄송합니다). 솔직히 성당을 안가면 슬기와 엄마가 나를 아주 몹쓸 사람 취급하기 때문에 눈치를 보며 가는 측면이 강하다. (엄마, 죄송해요.)

나는 그렇게 나이롱 신자이지만, 그 나이롱 끈이라도 놓지 않고 살려고 하는 것은, 병원에서 지내다보면 인간의 한계, 의사의 한계를 느끼는 경우가 많아서, 환자를 위해서 의사인 내가 아무것도 해줄게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환자를 위해 손잡고 기도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일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기도문을 만들고 지향을 갖는 자유기도를 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매우 어려운 일이 된 탓에 요즘에는 묵주반지를 이용해 주의기도나 성모송 같이 정해진 기도문을 반복하는 편이다. 버스를 타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회의 참석하는 중에 딴 생각이 날 때, 불현듯 누군가를 위해, 그의 평안을 위해, 나약한 나를 위해 기도한다. 종교성 여부를 불문하고 인간에게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인 것 같다. 특히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는.

 

 

하루라도 착하게

지난 일요일 아침, 슬기와 함께 성당에 갔다. 이미 청소년이 되어 버린 슬기는 엄마보다 친구가 좋은 나이가 되었는지, 친구랑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집을 나서자 마자 저만치 앞서서 뛰어가 버린다. 8개월동안 주말미사를 불참한 상태에서 고백성사를 보러 가는 길이라 슬기를 따라 뛰기보다는 부담스럽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으로 성당을 향했다. 고백성사를 보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마음속으로 죄를 정리한다. 어휴, 어차피 내 죄는 어차피 반복될 것이고 나는 쉽게 착해지지 않을텐데 이거 꼭 봐야 하나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나마 조금이라도 죄를 덜어야겠다는 면피주의적인 마음이 앞서서 불안한 마음을 꾹 참고 내 차례를 기다린다. 고백성사의 내용이나 이에 대한 신부님 보속 말씀은 비밀을 지키라 되어 있으니 내가 그 말을 지면으로 옮길 수는 없겠으나, 나를 개인적으로 전혀 모르는 신부님이 내 삶의 맥락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도 상당히 정확히 상황을 파악하시고 진단을 내려주시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사람 사는게 비슷해서 그런걸까? 나는 가능하면 구체적으로 내 죄의 상황을 묘사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신부님께서 그 상황에 대해 여러가지 질문을 하시면서 코멘트를 해 주셔서 유쾌하기도 하고, 정확한 진단과 치료방법을 제시해 주시는 것에 깜짝 놀랐다. 돌아서 나오는 마음 한편에는 오늘 하루라도 착해지자, 남의 탓을 하고, 구조와 제도의 탓을 하고, 상황의 비합리성을 논하는데 열중하느라 정작 나를 돌아보는 데에는 소홀해졌구나 하는 반성의 마음이 절로 든다.

 

남을 위해 내 놓을 것이 있다면

요즘 의과대학 학제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어 통합교육이나 PBL 교육이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본과 1학년 1학기, 의대생을 고통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10학점짜리 해부학실습이런 과목은 없어진 것 같다. 공포라는 것은 해부학 실습이 무서웠다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해부를 해 놓고 평가받기나 기발 해부학 땡시, 도대체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체 장기 곳곳의 이름을 외우는데 급급했던 쪽지시험, 그리고 최대학점 과목의 막강한 시험 후유증으로 형편없이 떨어진 나의 성적, 그것이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학기를 마쳐가던 무렵, 우리 동기들 몇 명이 우리도 해부학 실습을 마친 기념으로 사후 시신기증을 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나눠 본 적이 있었다. 어차피 죽어 땅 속에 묻히면 몇일만에 썪기 시작해 금새 흙으로 돌아갈 몸인데, 후배들을 위해 시신 기증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누군가가 내 놓은 것이다. 나는 내 스스로가 그런 일에 선뜻 찬성의견을 내 놓을 거라고 생각해 왔는데 막상 그런 제안을 들으니 망설여짐이 있었다. 해부를 잘 하는 한 동기가 겨드랑이 림프절 주위를 아틀라스처럼 예쁘게 해부를 해 놓아서 에술작품처럼 느끼게 해 주었지만, 당시 그 아래쪽에서 느리고 둔한 손재주로 손바닥 해부를 담당했던 나로서는 차마 내 몸을 나 같은 누군가에게 맡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전에 의사파업이 시작되는 바람에 해부학 수업은 정식 종강수업과 시신을 기증하신 분들께 대한 기념식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막을 내렸고 우리의 시신기증 논의도 흐지부지 되고 말았었다. 나는 과연 내 몸을 내 놓을 수 있을까?

 

마침 성당에서 조혈모세포 및 뇌사시 장기기증, 각막 기증을 위한 신청서 작성을 받고 있었다. 조혈모세포 기증을 위해서는 기증자의 나이가 만 40게 이전이라는 기준이 있어 나는 이 기회마저도 곧 놓치겠다 싶어 팔을 걷어 붙이고 채혈을 했다. 뇌사시 장기기증과 각막 기증 신청서도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실재 내가 조혈모세포 기증자가 될 확률이나 뇌사를 당하여 장기기증을 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각막 이식은 자연사 후에도 가능한 일이니 잘 하면 각막이식은 실천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일요일 아침, 내 마음의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해 작은 성의를 보였다는 만족감으로 성당을 나선다. 마음 한 쪽에 나는 과연 얼마나 사회에 기여(contribution)하고 사는 존재인가 물음이 생긴다. 언제부터인가 철저하게 나만을 챙기고 살아온 것에 대해 반성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의사라는 직업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기 쉽고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병원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환자만 보면 큰 문제가 없는 존재가 되다보니 소통의 부재 공간에서 존재적 자각(insight)없이 살기 쉬운 것 같다. 다른 사람과 제대로 소통하기,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기, 이 두가지를 몸과 마음의 축으로 삼아 봄날인데 눈 내리는 이 흉흉한 계절을 이겨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