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연륜이 짧아서인지
누군가를 한번 보고 척 알아차리는 그런 천리안은 없다.
그래서
처음 환자를 만났을 때의 인상이
이후 전개될 우리 관계에 결정적이지 않다. 한번 봐서는 잘 모르겠다.
몇번 만나보고
이얘기 저얘기 해봐야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다.
전이성 유방암 환자들은 한번 인연이 맺어지면 오래 갈 사람들이지만
조기 유방암 환자들은 4번에서 8번 정도의 항암치료를 하는 날, 드물게 그 사이 소소하게 문제가 생길 때 만나고, 이후 추적관찰은 외과에서 하게 되니까 긴 인연이 아닌 경우가 많다. 사실 수술한 유방암 환자들은 무슨 문제가 생겨도 저절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자기 힘으로 다 이겨내기 때문에 내가 크게 신경 안써도 다 좋아진다.
이제 갓 30을 넘긴 아가씨.
키 크고 날씬하고
눈썰미가 날카롭고 성격도 만만치 않아보였다.
아직 미혼인데 새침해 보이기도 하다.
무슨 일 하시냐고 물었더니 공무원이라신다.
3-4개월 정도 항암치료 할건데 쉴 수 있냐고 물었더니 끄덕끄덕.
유방암 1기. 항암치료 4번 하기로 했다.
항암치료 하면 난소기능이 떨어지고 생리도 불규칙해질거라고 설명했다.
항암치료 이후에 호르몬제도 먹어야 하는데 임신에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설명했다.
에이, 그럼 결혼 안할래요.
가늘디 가는 팔뚝, 자기는 일반 생리식염수만 맞아도 혈관이 잘 터진다고 한다.
아드리아마이신은 어림도 없는 혈관이다. PICC (말초혈관을 이용한 중심정맥 삽입술)를 하기로 했다.
항암치료 부작용, PICC 넣어야 하는 이유, 이런 걸 설명하는데, 약간은 귀찮은 듯한, 별로 집중하지 않는 듯한 반응이다.
"그럼, PICC 넣고 항암치료 시작합시다. 괜찮으시죠?"
별 대답이 없다. 동의를 하는건지 마는건지...
운이 좋은 환자는 당일 PICC 넣고 항암치료도 받고 한꺼번에 다 하고 가시는 분도 있는데
이 환자는 그날 스케줄이 꽉 차서 PICC를 넣을 수가 없었다.
다른 날로 예약하고 다시 병원에 와서 PICC를 넣고 항암치료를 했다.
PICC를 넣고 나서 피가 많이 났는지 혈종이 생기고 통증이 너무 심해 결국 넣은지 3일만에 다시 뺐다.
팔이 퉁퉁 부었다. 항암치료를 시작한지 2주 안에 몇번을 왔다갔다 했다.
변비가 왔다가 설사를 했다가
목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혈종이 생겨서 팔도 아프고
여기저기 아주 사소하지만 성가신 문제들이 계속 생겼다.
나는 환자가 화내고 날카로와 질까봐 내심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별 말이 없다.
오라는 날 오고, 시키는 대로 소독도 잘 하고, 별 불평이 없다. 수첩에 상태 변화도 잘 기록해 오신다.
어느날 기록이 뚝 끊겨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컨디션 좋아져서 나가 돌아다니느라고 수첩을 못 썼다고 한다. 툭툭 무뚝뚝하게 말하는 스타일이지만, 볼수록 정감간다.
그녀가 오늘 두번째 싸이클 치료를 받으러 왔다.
최근 1주일간 수첩에는 OK!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상한 후드티를 입고 왔다. 티셔츠가 안어울린다고 농담을 건넸더니, 머리를 가려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한다.
머리는 왜요? 아직 안빠진 건가요?
아니요, 가발이에요.
어디 좀 보여줘요.
꽤 스타일도 괜찮고 멋지다. 후드티로 가리지 말고 벗고 다녀요. 훨씬 좋아보이는데요!
망했어요.
왜요?
저 완전 돈 많이 주고 1차 항암치료 하기 전부터 미리 가발도 맞추고 머리도 다 밀었는데요,
가발이 완전 설운도에요.
잘 모르겠는데요! 별로 가발 티 안나요.
아니에요 완전 설운도에요 망했어요. 비싼건데.
얼마에요?
90만원.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들은 가발가격 중에 제일 비싼 가격이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이리 저리 뜯어봐도 내가 보기엔 괜찮아보인다. 머리카락을 만져보니 감촉도 좋다. 인모로 만든 가발이라고 한다.
쿨한 아가씨, 자기는 설운도 스타일 참을 수 없다며 그냥 두건 쓰고 다니는게 낫겠다며 호탕하게 웃으며 나간다.
3주전 생긴 팔의 혈종도 다 흡수되었고
목도 안아프고
구토감도 전혀 없고...
이제 병원 자주 안 올거라고 한다. 3주에 한번씩만 딱딱 와서 항암만 받고 갈거라고 한다.
오늘은 PICC 없으니까 발에 맞아야겠네요. 발로 맞는데도 새면 어떻게 하죠? 그런 큰일인데...
혼잣말 한다.
젊으니까 상처도 금방 아물고 잊어버리나보다.
난 그녀의 뒷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옛날 스타일보다 가발이 더 나아요. 본전 뽑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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