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조기유방암

외래에서 환자들과 정이 들다

슬기엄마 2011. 6. 20. 19:09

항암치료 주기가 대개 3주라
3주에 한번은 환자들을 만난다.
매주 치료도 있어서
매주 보는 환자도 있다.
그들을 만나면
오늘은 월요일이구나,
벌써 3주가 지났구나
그런 시간의 흐름을 깨닫게 된다.
일상은 바쁘고 정신이 없어 오늘이 몇일인지, 무슨 요일인지 잊고 살기가 쉬운데
외래에서 만나는 얼굴 익숙한 환자들이 나의 날짜 감각을 살려준다.

오늘 외래에서
죽어도 항암치료는 안하겠다는 환자는 결국 안하기로 하고 갔다.
그래도 3개월에 한번씩 검사하기로 했다. 재발한 환자를 수술한 거니까... 이제 그는 3개월 후에...
수술 전 항암치료를 할 때마다 이거 꼭 해야하냐고 틱틱거리던 환자는 수술을 마쳤다.
이제 그는 6개월 후에...
시간이 이렇게 흘러간다.

어디 보험회사인지 모르겠는데
매번 외래에 올 때마다 그때그때 보험회사 제출용 진단서를 떼어가야 한다며
음료수를 사 오는 환자가 있다. 
(보험회사 형식에 맞춰서 진단서를 쓰는 것에 대해
나는 평소 심히 분노를 느끼는 편인데
- 물론 환자와는 직접 관련이 없고, 따라서 환자는 내가 분노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
그걸 눈치 챈건지 음료수를 자꾸 사온다.)

외래에서 치료하다가 열 나서 입원하고,
수치가 회복되지 않아 항암치료가 지연되고, 그러다가 입원하고....
그렇게 고생할 때마다 의사와 환자의 만남이 잦아지고 정이 드나 보다.  
확실히 상태가 않좋은 환자들과 관계가 돈독해진다.
자주 만나고 상의하고 때론 싸우면서 인간적인 신뢰를 쌓게 되나보다.
그렇게 한번 크게 고생하고 나면 그들과는 편안한 관계가 된다. 마음이 잘 통하게 되니까..
그래도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아야 할텐데...

호르몬 치료를 하면서 관절통, 붓기가 유달리 심한 환자.
병기가 낮으니 주위에서 다 걱정말라며, 혹은 앞으로 뭘뭘뭘 조심해야 한다는,
자신을 둘러싼 주위 사람들의 말이 많은게 더 힘들다고 한다.
호르몬 치료만 하면 되는 환자들은 외과에서 주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약을 처방받는데
너무 부작용이 심해서 내과에 오셨다. 
2주, 3주, 4주 간격으로 세번 만났다.
나는 특별한 약을 처방하기 보다는
1번째 만남은
일단 지금 왜 이렇게 아프고 힘든지 호르몬 부작용의 원리에 대해 설명했고
2번째 만남은
건강했던 과거에 연연해서 그때와 똑같이 몸상태가 따라주지 않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것으로 마음을 전환하라고 권유하였다.
3번째 만남은
운동요법이 왜, 얼마나 도움이 되어 왔는지, 조금 강도높은 운동을 12주 정도 열심히 하고, 그 다음 12주는 내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특정 프로그램을 배워보거나, 소품을 만들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을 추천하였다. 연애를 하면, 쇼핑을 하면, 기쁘고 아프던데도 안 아픈 것처럼 우리 몸에 즐거운 일을 만들어줘서 지금 아픈 것을 좀 잊게 해주는게 도움이 되겠다고... 그렇게 6개월 계획을 세웠다.
나는 다음번 만남 이후로는 이 환자를 만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처음에는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었던 그녀.
이제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힘든 것도 잘 참아내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나를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아직 '힘드시죠' 라고 질문하면 눈가에 금방 눈물이 맺힌다. 그래도 이제 울지는 않는다.

그렇게 나를 만나도 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어
나를 떠나가고...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 재발이 되면 나에게 올 거니까...
그렇게 정만 쌓고 다시 만나면 안되는 관계. 불륜도 아니고...
나의 불륜 애인들이여, 정만 쌓고 떠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