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가슴으로 사랑하기 1020

가끔은 믿을 수 없이 놀라운 환자들

지난 3주 동안 진통제 드신 날짜, 시간, 진통제 종류, 양을 다 기록해 오신 환자. 한번에 몇백알씩 약을 가지고 가신다. 진통제 양이 매우 많다. 항암제나 방사선치료에 반응하지 않으면서 아주 느릿느릿 자라는 종양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척추 깊은 근육쪽에 종양이 자라서 다리쪽으로 내려가는 신경을 누르니 걸음을 못 걸으실 정도로 아파서 협진 의뢰가 되었다. 환자는 너무 다리가 아파서 죽고 싶다고 했다. 부인은 옆에서 눈물 바람이다. 환자가 죽고 싶다는 말을 할 때는 위기이자 응급상황이다. 당장 입원시켜 작용시간이 빠른 주사진통제로 환자에게 총 필요한 진통제 용량을 계산하였다. 어마어마하였다. 좀 줄였더니 금방 다시 아파지고, 발을 쭉 펴고 눕지도 못할 정도였다. 붙이는 진통제는 별로 효과가 없었다. 마취..

능력없는 선배의사

저는 단연코 100점짜리 의사가 아닙니다. 아마 저는 최선을 다해도 80점짜리 의사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전 최선을 다해 80점을 맞으려고 노력할 겁니다. 그것이 임상의사인 제가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대학병원 의사의 역할은 환자 진료를 잘 하는 것 외에도 연구 교육 이라는 중차대한 3대 임무가 기본적으로 부여되는데, 요즘에는 이 중에서도 연구를 강조하는 것이 대세입니다. 연구도 겉으로 측정가능한 논문 편수나 점수가 중요합니다. 의학이라는 것이 원래부터 확고한 정답이 있는게 아니기 때문에 대학병원에서는 끊임없이 연구하고 논문을 내는 활동에 주력해야 하는 것에 100% 동의합니다. 그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대학이라는 기관에서 일하는 의사 누구에게나 각인된 사실입니다. 그것이 자존심이고 ..

약 처방이 빠져서 죄송합니다

암환자는 치료 기간이 길어지면 그에 따라 약도 많아진다. 다양한 증상이 나타나니까. 나는 진료실에 약통을 준비해 놓고 자주 처방하는 약은 샘플로 준비해서 약을 처방하면서 환자에게 직접 약에 대해 설명한다. 약이 캡슐인지 아닌지, 쪼개서 먹어도 되는지 아닌지, 무슨 약이랑 헷갈리는지 (변비약이랑 와파린이랑 헷갈려서 먹고 INR이 9가 넘어 온 할머니가 계신 뒤로 약을 모양과 색깔로 설명하게 되었다) 이 약은 새롭게 왜 처방하는지, 무슨 증상이 있으면 이 약을 드셔야 하는지, 먹으면서 뭘 주의해야 하는지 그런 설명을 주절주절 하면서 약을 처방한다. 샘플이 준비되지 않은 약을 처방할 때는 컴퓨터 화면으로 약 사진을 보여드리면서 '하얀색에 노란띠 있는 이 캡슐은 속쓰리지 않은 관절염약이니까 하루 두번 드세요' ..

스킨쉽을 해주세요

미국에서 남동생이 왔다. 몇달전 보았던 누나가 아니다. 잘 모르겠지만 누나 상태가 나쁘다는 건 의사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것 같다. 난 사실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에 있는 가족도 더 늦기 전에 한번 와서 보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미국 사는 친정아버지와 남동생이 비행기를 타고 급히 오셨다. 나는 그동안의 경과를 설명드리고 앞으로 예상되는 긍정적인 측면, 부정적인 측면의 모든 가능성에 대해 설명드렸다. 그리고 최근 부정적인 증상들이 더 많이 나타나고 있어서 더 늦기 전에 가족들을 다 보는게 좋을 거 같아서 오시라고 했다고 말씀드렸다. 패혈증이 해결되지 않으면 이번주에 돌아가실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최선을 다해 이번 고비를 넘겨야겠지만, 그래서 가능한 시간을 많..

나의 결심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자연과 생체리듬을 가까이 할 것. 숲이나 산, 강을 자주 다니며 원기를 잃지 말 것. 계절이라는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길 것. 그러므로 잠이나 규칙적인 생활, 휴식 등 내 몸이 원하는 기본적인 욕구를 무시하지 말 것. 이런 생활 수칙을 지킬 때 몸의 균형 회복과 치유에 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평온함. 내면의 초연함을 갖고 명상이나 정상 심박동 훈련을 규칙적으로 할 것. 평온함보다는 사람들의 행복에 기여하고, 사람들의 행복과 사고방식을 변화시켜 균형적인 미래를 만들려는 욕구를 실천하면서 느끼는 충만한 느낌도 좋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가진 한계를 무시하는 것. 그것은 가장 위험한 행동이다. 그것을 긍정적인 스트레스라고 믿으며 중독되지 말자. 스트레스 양을 늘리고..

기분은 좀 어떠세요?

한국의 의료현실에서 대학병원으로 암환자가 몰립니다. 그래서 외래 진료시간에 환자 몸 상태를 확인하고 치료 전략을 결정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해요. 그러니 마음은 어떠시냐고 물어볼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Journal of Clinical Oncology 라는 종양학 저널에서 2012년 4월호에 암환자를 위한 심리사회적 지원의 중요성에 대한 특집호가 발행되었는데 거기 실린 논문을 읽다보니 유방암에 대한 1차적인 치료를 다 마치고 정기검진을 위해 병원에 오는 환자들, 그들을 위한 치료 전략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하고 있네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과 마음 때문에 여러 모로 힘든 상태에서 주치의가 환자에게 요즘 기분은 어떠신지 그렇게 감정적인 상태를 묻는 관심을 보이는 것을 원한다는 통계도 인용되어 ..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다

뇌종양에 걸린 프랑스 정신과 의사가 20년만에 재발한 뇌종양과 투병하며 쓴 책입니다. 31세에 뇌종양을 진단받고 완치된 후 그는 인지신경학을 전공하는 정신과 의사로 살았습니다. 누가 이런 말을 했느냐에 따라 울림이 다르네요. 그는 의사 생활을 하는 동안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를 많이 만났는데 그때의 경험, 그리고 투병 중인 지금 자신의 경험을 담담하게 잘 정리한 글입니다. (좀 놀랍습니다) 그의 서문에서 환자들과 교류하며 나는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적절한 순간은 없다는 걸 배웠다. 환자에게 충격을 주지 않는 조건에서 언제든지 죽음에 대해 자연스럽게 말을 꺼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끝이라는 느낌을 주어서도 안 되고, 얼버무려서도 안 된다. 죽음은 예측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회복에 대한 가능성..

항산화제에 대한 생각

유명한 관광지에 가면 트럭이나 가게에서 암에 좋다고, 면역력 증강에 좋다고 무슨 열매, 식품 그런 걸 많이 팝니다. 저도 관심이 많아서 가서 물어봐요. 그거 좋은거래요? 한번 질문하면, 아주 자세한 설명을 들어야 합니다. ^^ 요즘에는 항산화제라며 파는 식품들이 많더군요. 우리 몸은 정상 세포와 암세포 모두가 생존을 위해서 뭔가 에너지원을 받아들여서 대사하고 대사 산물을 이용해 다른 형태의 에너지원을 합성하기도 합니다. 이런 대상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독성 산화물이 발생하기 마련인데, 정상 세포는 아주 미세한 범위 내에서 자체 조절능력을 가지고 이러한 산화 독성을 중화하고 스스로 균형을 잡아가는 것에 비해, 암세포는 그런 조절 능력이 없습니다. 원래 암세포의 산화 독성 상태를 평가해 보면 정상세포보다 그 수..

무엇을 남길까요

삼십대 중반의 엄마 그녀에겐 여섯살난 아들이 있다. 그녀는 매년 건강검진을 했었고 매번 아무 이상도 없다고 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4기 위암을 진단받았다. 경황없이 항암치료를 시작했지만 약제 반응이 신통치 않다. 갑자기 복통이 찾아오고 물도 넘기지 못하고 다 토한다. 뱃속에 스텐트라는 것을 넣고 나서야 겨우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불과 몇개월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그녀는 아직 분노 단계에 있다. 보통 첫 항암치료의 효과는 최소한 몇개월은 간다고 들었는데 세달도 안되어서 약효가 없어진 것 같다. 바꿔서 다시 쓴 항암제도 효과가 없는지 장폐색이 왔다. 그녀는 나의 미래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우선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뭔가 나의 죽음을 준비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막연..

가족 중에 암환자가 생겼을 때

가족 중에 암환자가 생겼을 때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가족은 공기와 같은 존재. 평소에는 소중함을 모르고 지내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때야 비로소 소중함을 알게 된다. 소중하지만 무심하게 지냈던 우리 가족의 누군가가 암을 진단받았다. 나는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까? 가장 중요하게 명심해야 하는 사항은 병원의 의료진 못지 않게 가족이 중요한 치료 팀의 일원이라는 사실이다. 즉 나도 치료과정을 함께 하는 멤버 중의 하나라는 것. 약을 제때 챙겨주는 일, 부작용을 모니터하고 관리하는 일, 환자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기록해 두는 일, 환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알리는 일, 환자 곁에서 지금 하고 있는 치료가 제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 아닌지를 관찰하고 상의해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