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993

내가 한 실수

매주 만나는 환자들이 있죠. 치료 스케줄 때문에. 그런 분들은 사실 저에게 아주 가까운 분들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렇게 자주 만나는 사람은 없거든요. 거의 매일 밤에 늦게 들어가는데, 가보면 가족들은 모두 잠들어 있고 아침에는 눈 뜨면 허둥지둥 병원으로 뛰어오니까 가족과 별 대화를 못해요. 그거에 비하면 정기적으로 지속적으로 그런 만남을 갖고 지내는 환자분들과 훨씬 관계가 밀접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환자도 서로가 편한 관계가 됩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서로가 별 말 없이 괜찮으시죠? 네. 저 오늘 수치 괜찮죠? 항암제 맞고 갈께요 그렇게 썰렁한 문답으로 진료를 마칠 때가 있을 정도에요. 그렇게 썰렁하게 말하고 나면 서로 눈을 마주치고 웃습니다. 그 웃음의 의미조차 서로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

한동안 소홀히

저의 평소 결심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일주일에 5번은 블로그에 글을 올리자' 그런 것인데요 (환자 보는거 빼고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여 블로그 글을 쓰는 것이 제 삶의 원칙이었는데) 지난 한달, 그리고 최근 몇일 글쓰기가 뜸했습니다. 어제까지 박사학위논문 심사를 받느라 그랬습니다. 그것때문에 다른 많은 일들이 정지되어 있네요. 다른 건 괜찮은데 블로그가 제일 마음에 걸렸습니다. 블로그는 제 진료일기인데 그걸 안쓰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니 아주 마음이 찜찜했어요. 저는 블로그 글을 쓸 때 오늘 내가 진료했던 우리 환자들과의 대화, 삶, 시간들을 되돌이켜 생각하는데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진료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환자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 환자들이 티 안내고 글 읽고 가시는 분..

변화는 사람으로부터

치과 선생님과 함께 지난주에 우리병원 치과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주로 우리 환자 치과 진료를 의뢰드리는 선생님이십니다. 선생님은 치과 환자 중에 유방암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가 많은데 유방암은 전이가 되어도 다른 암보다 생존기간이 길기 때문에 치료기간도 길고 그러다보니 항암치료 기간 중에 치과 시술을 받아야 하는 환자들도 많아서 늘 고민이라고 하셨어요. 시술을 해야 하는데 이 환자가 그 정도의 치과 치료를 견딜 전신 상태가 되는지 항암제 독성이 해결되는 기간을 고려한다면 언제 치과 시술을 하는게 좋은지 지금 치과 시술이 급한지 항암치료가 급한지 그런 걸 판단하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치과 시술과 치료에 대해서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치과 선생님이 권하시는 그 치료를 지금 당장 꼭 해야 하는건지..

약에 예민하시군요

약에 예민하시군요 이렇게 말하면 살짝 화를 내는 환자들이 있다. 내가 예민하다구요? 저 원래 안 그런 사람인데… 약에 예민하다는 것은 사실 의학적인 표현은 아니다. 내가 환자에게 약에 예민하다고 말을 할 때는 그 환자가 정서적으로 예민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약이 대사되는 과정에서 약을 분해하는 효소가 작용하게 되는데 사람마다 그 과정에 차이가 있어서 같은 약을 써도 누구는 잘 대사되지 않고 몸에 오래 남아 독성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누구는 부작용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멀쩡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독성이 효과와 관계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한마디로 그 약에 대해서 나는 그렇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예민하다고 말할 ..

중환자실에서

표정을 감추고 내 할 일을 다할 것 나라는 사람은 마음이 표정에 다 드러난다. 그래서 남들이 내 마음을 쉽게 읽는다. 환자들도 날 보고 내 마음을 아는 것 같다. 항암치료를 하고 나서 찍은 종양평가 사진이 많이 좋아졌을 때 항암치료를 하고 나서 복부 불편감, 뼈 통증이 좋아졌을 때 항암치료를 하고 나서 숨차던 게 좋아졌을 때 복막전이로 장 마비가 심해 몇 주를 고생하다가 장루 수술을 하고 나서 환자가 잘 먹게 되었을 때 너무 기운이 없었는데 갑상선 호르몬 검사를 해서 진단하고 약을 먹은 후 기운이 좋아졌을 때 뇌전이로 실망하고 눈물짓던 환자가 방사선치료하면서 증상이 좋아지고 다시 씩씩해 졌을 때 심지어 변비가 심하다고 툴툴거리다가 내가 준 마그네슘 먹고 좋아졌을 때 하다못해 알러지로 눈물 콧물로 고생하다..

삶의 철학을 전환한다는 것은

삶의 철학을 전환한다는 것 우리 암환자들은 먹거리에 대해 지극히 관심이 많지만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단지 좋은 건강보조식품에 집중한다고 해서 암의 예방하거나 면역력이 증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외래에서 환자들과 하는 대화 중 70% 이상은 먹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전 그런 질문을 하실 때 딱 잘라서 그건 드시지 마세요 그렇게 강하게 얘기하는 편은 아닙니다만 마음 속으로 그리고 기회가 될 때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몸에 좋은 그 무언가를 찾아 그걸 열심히 먹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균형잡힌 식단을 짜서 음식으로 드시는 것이 가장 좋다, 식단을 바꾼다는 것은 단지 음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것인가 삶의 철학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저도 압니다. 식단..

박카스 같은 한마디

60세 여자 환자. Vulvar cancer. 드문 암이다. 폐전이가 되었지만 이제 쓸 만한 항암제도 없다. 복수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한다. 다음 치료로 어떤 치료를 했으면 한다고 선뜻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외래에서 경과관찰만 하고 있다. 매번 외래에 환자가 오면 환자는 그럭저럭 지낼만 하다고 하시고, 환자가 나가고 나면 남편과 아들이 남아서 몇가지 더 질문을 하신다. 매번 우리의 대화는 비슷하다. 좀 어때요? 조금 더 나빠지신 것 같아요. 좋은 치료법 없을까요? 글쎄요. 1세대 항암제로 시도해볼 수는 있겠지만 반응율이 10% 미만이라 그걸 노리고 치료에 도전하다가 그나마 지금의 컨디션도 유지되지 못하고 나빠질 것 같아요. 항암치료 하면서 많이 힘들어 하셨잖아요.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까요? 이미 ..

오래된 뼈전이

뼈로만 전이되면 예후가 좋다면서요 유방암이 재발하면 몇 년만에 재발했는지 호르몬, HER2 수용체 상태가 어떤지 재발한 장기가 어디인지 재발과 관련된 증상이 있는지 그런 것들이 이 환자의 예후를 가늠하게 하는 임상적 요인들이다. 예를 들면 유방암 수술을 하고 7년만에 재발하였고 (2년이 미쳐 못 되어 재발하면 예후가 나쁘다) 뼈로만 전이되었으며 (뇌나 간, 폐 등의 장기보다는 뼈나 림프절 전이만 있는 경우 예후가 좋다) 호르몬 수용체가 강양성이고 전이가 되었지만 증상이 없으면 항암치료보다는 호르몬 치료를 권고한다. 강력한 항암제를 무조건 많이 쓴다고 해서 환자에게 이득이 되는게 아니라는 점이 이미 잘 입증이 되었기 때문에 항호르몬제로 치료한다. 그래서 우리 병원 유방암 클리닉을 다니시는 전이성 유방암 환..

자존심

의사의 자존심 의료보험수가의 문제 DRG의 시행 의료전달체계의 문제 질높은 의사 양성을 위한 교육의 문제 사보험 제도의 폐해 잘못된 의료 정보의 만연 최고로 질높은 의료를 추구하는 국민과 의료비용을 규제하려는 정부의 대립 시스템과 제도, 정치적 논쟁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문제가 많은 주제들입니다. 저는 사회학을 공부했던 사람으로서, 이런 주제들에 대해 민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때는 이런 주제에 대한 연구가 저의 학문적 목표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사회적 발언을 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발언을 하지 않는게 잘하는 짓이라는 게 아니라 저는 당장 내 눈앞의 환자 한명의 이익을 위해 이리 저러 머리 굴리고 대안을 세우는 과정에서 환자 한명마다 독특한 맥락에서 치료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기걸린 엄마

최초 진단부터 병기가 높았다. 수술전 항암치료를 했지만 HER2 양성인 환자는 수술 전 요법으로 허셉틴을 허용하지 않는 우리나라 보험제도 때문에 수술을 하고 허셉틴을 써야 보험이 되었다. 수술시 종양은 별로 줄지 않았다. HER2 양성 환자는 가능한 빨리 HER2를 막는 약을 쓰는게 성적이 좋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임상연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실정이다. 여하간 수술을 하고 허셉틴 1년을 썼다. 치료 받는 내내 환자는 작은 일에도 병원에 찾아와서 증상을 호소하였다. 환자는 자신의 증상을 자세히 의사에게 표현하고 대응지침을 받는게 필요하지만, 너무 자주 증상을 호소하면 의사도 무덤해지는 마음이 생기는 걸 부정할 수 없다. 그런 나의 무덤한 마음을 지적이라도 하듯이 그녀의 증상은 항상 어떤 병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