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993

슬기의 일기 - 6

나의 든든한 백업, 아빠 우리 집은 엄마가 더 바쁘다. 저녁이면 퇴근하는 아빠를 만날 수 있지만 엄마는 만나기 힘들다. 심지어 이번 기말고사 기간 동안 엄마는 학회 차 미국에 나가셨다. 수 년 전부터 이런 일상이 반복됐기 때문에 초등학교 때부터 엄마 대신 아빠가 내 교육에 더 신경을 쓰고 계신다. 아빠는 대화를 하다가 애매하거나 궁금한 것이 생기면 즉시 책꽂이 앞으로 달려가셔서 필요한 내용을 찾아보는 습관을 갖고 있다. 집 안에 관련 책자나 자료가 없으면 아이폰으로 검색을 하거나 나중에라도 다시 찾아보는 집념이 있으시다. 정말 꼭 찾아보신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 학원이라고는 안 다녀봤는데 4학년이 되니 아빠는 최소한의 선행이라도 하는 게 좋다며 초등학교 전과정의 수학 교과서를 구해 수학 선행학습을 ..

슬기의 일기 - 5

참여하고 누리는 삶에 대해 지난 5월, 바야흐로 체육대회 시즌. 우리 반도 체육대회를 대비한 연습을 시작해야 했다. 체육대회 분위기는 뭐니뭐니해도 반별로 옷을 맞춰 입는 ‘반 티’부터 무르익기 시작한다. 학급 홈페이지에 몇 개 사진을 올리면 아이들이 투표를 하는 방식으로 디자인을 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원하는 옷을 찾아보지도 않고, 투표하지도 않았고, 득표 수가 많은 옷은 입기 싫다는 반응이었다. 하나로 모인 의견도, 특별히 강력한 반대의견도 없는 상태에서 흐지부지 제작이 무산될 뻔 했다. 막판에 겨우 의견을 모아 옷을 맞춰 입을 수 있었다. 체육대회를 위해 반 티를 정하는 일은 개인적인 일도 아니고 굳이 내가 나설 일도 아니라 슬쩍 묻어갈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결과는 내게 영향을 미치기 때..

포도 깻잎 고추 감자 마늘 미나리 쥐포

뼈로만 재발했다. 유방암은 재발된 위치에 따라 예후의 차이를 보이는데 뼈로만 전이된 유방암은 비교적 예후가 좋은 편이다. 그녀의 상태는 뼈로만 전이되기는 했지만 그 범위가 광범위했다. 그런데 증상은 거의 없었다. 사진을 보면 깜짝 놀라는데, 직접 그녀를 보면 더 깜짝 놀라게 생겼다. 그녀에게는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 그녀의 유방 조직에서 시행한 호르몬 수용체 검사는 강양성. 이런 사람은 호르몬치료를 시도해봐도 되겠다 싶어서 일단 호르몬 치료로 1차 치료를 시작하였다. 전이성 유방암 치료의 원칙은 일단 호르몬 치료의 대상이 되는지 안되는지를 확인하여 가능한 호르몬 치료를 하는 것이다. 약간 애매한 면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컨디션이 너무 좋아서 나도 그렇고 그녀도 그렇고 항암치료를 피하고 싶은 마음..

병 들어도 마음만은 떠나지 마요

끝까지 병원을 같이 다니는 부부들이 있다. 첫 수술 할 때도 재발했을 때도 컨디션이 나빠 입원할 때도 임종을 맞이할 때도 그렇게 끝까지 같이 하시는 분들을 보면서 사랑이란 이런거구나 깨닫는다. 손잡고 싶고 뽀뽀하고 싶고 그런 마음이 아니라 아플 때 안아주고 꺼져가는 등불을 지펴주는 지지자가 되어주고 힘없으면 밥도 떠 먹여주는 그런 사랑... 그런 보호자들은 환자 스스로보다 병에 대해 상태의 변화에 대해 더 잘 안다. 의사와도 적극적으로 소통한다. 나에게 미안해 하면서도 많은 상담을 원한다. 내가 그 마음의 십분의 일도 제대로 알수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겸허히 그들의 상담신청을 받는다. 그 마음은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커플도 꽤 많다. 암에 걸린 배우자를 원망하며 이혼을 요구한다. ..

엄마의 진료

전이성 유방암 전이된 곳이 한 두곳이 아니었다. 첨에 진단받을 당시 그녀의 상태는 많이 않좋았다. 너무 않좋아서 첫 항암치료를 하던 날, 나는 남편에게는 위협적인 경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암치료하고 상태가 더 않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간세포가 깨지면서 위험한 상황이 올 수도 있어요. 각오하고 치료를 시작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환자와 남편, 그리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1년반이 넘었다. 그녀는 직장의 배려로 근무조건이 조금 편한 곳으로 옮겨서 직장을 쉬지 않고 일을 계속 할 수 있었다. 두 아이의 엄마로 직장맘이 학교, 유치원을 오가며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점점 컨디션이 좋아지니 직장에서의 업무도 늘어나서 지난주에는 1주일 내내 야근을 했다고 한다. ..

세움

세브란스병원 본관 4층 - 유방암 클리닉 옆에 있어요 - 세움이라는 가게가 있습니다. 작년 말에 오픈했어요. 우리 병원 직원들과 신한카드 직원들이 후원한 물품부터 시작하여 각종 기부 물품을 판매하는 가게인데, 운영 6개월 후 첫 결산을 했더니 3천만원 정도의 이익금이 생겼다고 합니다. 암으로 투병중인 환우들을 위해 기금이 사용될 내용이고 첫 사업으로 4기 암환자 가족여행 후원사업을 계획중이라고 합니다. 지금 예산의 규모로 봐서는 1달에 한 가족 정도를 지원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여행 프로그램도 사회사업팀에서 짜주어 좋은 시간이 되도록 물심양면 지원하려고 합니다. 누구나 내 인생에 암이라는 복병이 생길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한명도 없습니다. 불현듯 병을 진단받고 정신없이 치료를 시작하지만 알고보면 마음은 상..

외래지연을 막을 수 있는 설명방식

4기 유방암을 진단받은 환자, 환자 : 저 언제까지 항암치료 해야하나요? 의사 : 병이 나빠질 때까지요. 환자 : 네? 뭐라구요? 병이 좋아질려고 하는데 나빠질 때까지 항암치료를 해야 한다구요? 그게 무슨 말이죠? 그 이유와 기전에 대해 한참을 설명해야 한다. 일단 첫마디에 당황한 환자에게 그 다음 의사 설명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앞에서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의사의 목소리는 그녀의 귓가에서 웅웅거릴 뿐. 그녀는 갑작스러운 당황스러움으로 의사의 설명을 이해할 겨를이 없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난 그래서 설명을 바꿨다. 나 : 일단 여섯번 정도 해보구요 치료 효과가 좋으면 조금 더 할께요. 아홉번 혹은 12번. 환자 : 효과가 좋은데 더 한다구요? 효과가 좋다는 건 낫는다는 거 아니에요? 효과가 좋은..

오늘 한잔 하세요!

CT를 찍고 온 환자 결과를 들으려고 남편도 같이 왔다. 잔뜩 긴장한 표정들. 결과가 좋다. 난 한마디 했다. 오늘 두분 맥주 한잔 하세요. 이 평범한 한마디에 너무나 고마워 하는 환자. 내가 그런 말을 해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어서 으쓱하다. 그래 이맛이야. 이런 말을 좀 더 자주 할 수 있는 의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기분좋은 말 축복하는 말 기쁨주는 말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인생의 아름다움을 공유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외래에서 적절한 의사의 표정

방문을 열고 환자가 들어오면 나 :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별 일 없으셨어요? 살이 좀 빠져 보이네요. 힘드셨나요? 혹은 호르몬제 드시더니 살이 좀 찌네요. 보기에는 좋아보여요. 혹은 항암제를 바꿨는데 특별히 문제는 없었나요? 그런 질문을 던진다. 환자 : 별로 먹는 것도 없는데 살이 쪄서 큰 일이에요. 혹은 약을 바꾸고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 대답을 한다. 나는 가끔 우리 관계가 꽤 오래되어 척 보면 서로의 기분을 아는 환자들을 만나면 머리카락이 많이 났네요, 오늘 스카프 멋지시네요, 오늘도 멋지게 단장하고 오셨네요, 안색이 좋아보여요 그런 개인적인 느낌을 전하기도 한다. 그러면 환자들도 선생님 지난번보다 안색이 나아보이네요, 오늘 디게 피곤해보이시네요, 박사논문 다 쓰신거 축하드려요 그렇게 개인적인 느..

마음 속 슬픔을 묻고

아주 용감씩씩한 환자가 있어요. 4기지만, 그리고 병이 좋아지는 듯 하다가 다시 나빠져서 지금 꽤 오랜 기간 동안 항암치료를 유지하며 치료하고 있지만 그는 정말 명랑하고 쾌할하고 잘 지내요. 그를 보기만 해도 내가 힘이 나는, 그런 젊은 환자입니다. 어두운 그늘이라고는 없어요. 젊어서 그런가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 그가 배가 아파서 예정에 없는 외래에 왔네요. 진통제 안 먹고도 잘 지내던 환자인데 배가 아프다고 하니 덜컥 겁이 나네요. 병이 나빠져서 그런가? 의사가 환자에 대해 갖는 그런 마음을 너무 솔직하게 노출하면 안된다고 해서 요즘 노력중이에요. 가면을 좀 쓰려구요. (우리 환자들은 제 표정을 너무 잘 읽어서 걱정이에요). 그래서 태연하게 내 마음의 걱정을 감추고, 요즘 뭐 특별히 다른 음식 먹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