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993

카레밥

오늘은 우리 내과부 멘토 멘티 모임이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1차 모임을 갖고 병원 밖에 나가서 식사를 하면서 2차 모임을 가졌습니다.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었는데 한 녀석이 소주잔을 들고 저에게 옵니다. 저에게 소주 한잔을 따라주며 자기 옛날 이야기를 하네요. 올해 4년차 레지던트인 그. 전문의가 되기까지 얼마남지 않은 어엿하고도 멋진 감염내과 의사입니다. 그가 인턴일 때 제가 4년차 레지던트였다고 하네요. 그는 그날 아침, 점심, 저녁을 다 굶고 일하고 있었대요. 인턴 생활이 그래요. 그날 제가 밤 10시 가까이 되는 시간에 편의점에 가서 카레밥을 사 가지고 와서 전자렌지에 밥을 뎁혀서 갔다 주며 먹으라고 했대요. 그에게는 그것이 그날 첫 식사였다고 합니다. 그 날, 그 밥을 잊을 수 없다고 나에게 소..

다시 만날 그녀

더 이상의 적극적인 치료는 어려운 것으로 결정을 했다. 환자를 돌봐 줄 사람이 있는 친정 집으로 가는게 나을 것 같았다. 남편은 일을 나가야 하니까 그녀를 돌볼 수가 없다. 혹시 병원 갈 일이 있으면 어떤 병원으로 가시라고 소견서도 준비해 드렸다. 우리 병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선생님이 계신 병원이라 그 선생님께 전화로 부탁도 드렸다. 그렇게 2달 정도 지났다. 그녀 상태가 많이 않좋아졌나 보다. 남편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환자가 그동안 치료받은 적이 없는 지방으로 가게 되니 무슨 문제가 생기면 연락하라고 내가 연락처를 줬었나보다. 임종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최근 몇일 환자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많이 힘들어 하니 가족은 또 당황하고 있나 보다. 진통 조절도 잘 안되고. 더 이상 집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최선을

제가 암환자 진료를 하면서 느낀 것은 환자를 위한 최고의 진료란 의사의 노력이나 능력만으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의사의 처방과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본적으로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쉽지 않아 저 개인적으로는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그런데 총체적인 의료행위 혹은 의료서비스의 질은 의사의 진료 행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원하는 시스템과 지원 인력의 노력에 의해 완성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특정 질환보다 암환자가 특히 그런 것 같습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다양한 문제가 치료 중에, 치료 후에, 발생하게 되거든요. 예를 들면 외래에서 항암치료 중인 유방암 환자, 치료 중 잦은 방광염 증상이 반복되었는데, 이번 치료기간 중에는 방광염이 악화되어 급성 신..

드디어 스웨터 득템!

벌써 3주가 지났군요. 3주 전 외래에서 손수 손뜨게질하여 저를 위해 스웨터를 만들어 주시기로 약속한게 말이죠. 사실 약속한게 아니라 환자가 입고 온 스웨터가 예쁘다며 내가 너무 군침을 흘렸더니 환자가 (마지못해) 제 걸 하나 만들어주시기로 한 걸지도 몰라요. 그렇게 해서라도 난 얻어 입고 싶었어요. 내 몸 사이즈를 잰 것도 아닌데 아주 잘 맞네요. 아침 외래에서 환자에게 이 선물 받고 너무 신나서 막 크게 소리 지르면서 자랑하고 싶은 걸 참느라 혼났어요. 그리고 지금도 이 스웨터를 입고 좋아서 혼자 실실 웃고 있어요. 자, 어떤가요? (김양순 간호사, 사진 잘 찍어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환자가 한 벌도 아닌 두 벌을 떠 오셨어요. 길이와 색깔을 달리 해서 센스있게! 지난 번 외래에서 어떤 색으로 스웨터..

손톱 관리

HER2 양성으로 허셉틴을 맞는 분들 혹은 새로 나온 퍼투주맙을 맞는 분들 그리고 먹는 약 타이커브를 드시는 분들에게 손톱 문제가 잘 생기는 것 같습니다. 암세포의 표면에 HER2 라는 물질이 발현되는데 표적치료제는 그 경로를 막음으로써 암세포만을 죽이는 효과를 갖게 되어 표적치료라는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피부 세포 중 일부에서도 HER2가 발현되기도 합니다. 손톱같은 정상 세포에서도 말이죠. 그래서 이런 약을 투약하는 환자 중에는 손톱이 약해지고 쥐뜯어먹은 것처럼 갈라지고 약해지는 분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아이들 목욕도 시키고 옷도 갈아입혀야 하고 등교하는 딸아이 머리도 빗겨줘야 하는데 내 손톱으로 아이들 얼굴에 흉터를 낼까봐 조마조마 합니다. 음식하랴 설겆이 하랴 집안일 ..

동반자가 있었으면 해요

우리 환자는 늘 별 말씀이 없으시다. 단아하고 미인이다. 성격도 수선스럽지 않고 얌전하시다. 통증이 심해도, '그냥 좀 아파요' 하시고 많이 힘들어도 '그러려니 해요' 그 정도 내색하신다. 병이 좀 나빠진 것 같아요 내가 그렇게 말씀드리면 큰 눈을 꿈뻑거리며 '그래요?' 그정도 반응하신다. 남편이 훨씬 예민하다. 꼬치꼬치 캐묻고 의사인 내 대답을 확실하게 들으려고 하시고 사진 찍으면 어디가 얼마만큼 좋아졌는지 확인해 달라고 하신다. 성격이 대조적인 부부다. 환자가 여자고 나도 여자니, 나에게 이런 저런 속내를 털어놓을 줄 알았는데 1년 가까이 우리가 함께 한 치료 여정동안 환자는 나에게 별 말씀이 없으셨다. 그러던 그녀가 오늘 나에게 한가지 요청이 있다고 한다. 선생님, 제 동반자를 찾아주세요. 제 곁에..

또 한번의 BRAVO!

오늘 저녁, 서울대 외과 노동영 선생님과 삼성서울병원 암교육센터의 조주희 선생님, 그리고 한국 유방암 생존자를 위한 교육프로그램 개발을 지원하는 골드만 삭스 사회공헌팀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 실재 자신이 유방암 생존자이기도 한 에린은 내가 종양내과 의사이고 유방암 환자를 주로 진료한다는 말을 듣자 마자 봇물 터지듯 질문을 던진다. 그녀의 질문은 내가 외래에서 환자들에게 받곤 하는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녀는 자신의 문제를 좀더 큰 사회적 틀 안에서 구조화하고 싶어하였고, 생존자들이 느끼는 문제들을 개별적인 노하우로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보다 표준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환자들은 그 환자들의 수만큼 다양한 질병경험을 하고 그들만의 스토리가 있는 ..

내년 농사준비 해도 되?

70세가 넘으신 할아버지 드물지만 남자 유방암 환자시다. 할아버지, 외모로만 치면 60대로도 보이지 않아요 내가 그렇게 말씀드리면 아주 좋아하신다. 나 듣기 좋은 말만 해줄려고 한다며 핀잔이지만, 정작 온 얼굴 웃음 가득이다. 실재 강원도에서 농사짓고 사시는데, 얼굴이 구릿빛으로 그을린 것도 멋있고, 인상도 좋으시고 전혀 70대 노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유방암 수술 후 3년만에 재발, 전이성 유방암을 진단받은지 또 3년이 지났다. 폐로 전이된 암은 아주 조금씩 조금씩 나빠지고 있었다. 병이 좀 나빠져도 정작 할아버지는 느끼는 증상이 별로 없다. 항호르몬 치료를 유지하는데, 폐 전이가 점점 커지고 종양 수치도 계속 증가해서 5개월전 젤로다로 바꾸었다. 젤로다를 바꾼지 3개월만에 검사했는데, 종양표지자 수치..

열심히 산책하세요 그게 사는 길이에요

말 안듣는 할머니. '이렇게 힘들거면 그냥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사람 잘 안 죽어요. 그러니까 제가 시키는대로 좀 돌아다니세요. 침대에 누워있지만 말구요.' '다리에 힘이 없어서 못 걷겠어. 한번 침대에서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는 것도 귀찮고 혼자 힘으로 잘 안되.' '제가 담당 간호사 선생님에게 부탁할테니, 귀찮고 힘들어도 하루 세번 침대에서 나와서 밖에 좀 돌아다니세요. 걷는게 힘들면 휠체어 라도 타고 바깥 바람 좀 쐬고 오세요.' 침대에 누워있기만 해서는 절대 기력이 회복되지 않는다. 암환자를 대상으로 한 모든 임상연구에서 환자의 예후를 결정하는 건 환자의 활동성이다. 자기 힘으로 밥 먹고 돌아다니고 똥도 잘 싸고 잠도 잘 자고 하는 그런 일상의 activity 가 환자의 예후를 결정하는데 무..

얘들아 모두 백조가 되어라

일요일 오후, 문자 메시지가 왔다. '저 홍석인데요, 선생님 병원에 계세요?' 나는 2009년 삼성서울병원에서 혈액종양내과 fellow 를 했었다. 연대를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전공의 수련을 받았던 9년의 시간, 나는 신촌에 익숙한 사람이었는데, 그 모든 것이 낯선 삼성병원으로 가서 임상강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fellow 를 하는 동안 내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지낸 건 내과 1년차들. 서로간에 호흡이 맞건 맞지 않건, 우리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병동제로 배치된 1년차들, 그 사이사이에 내 환자가 숨어있다. 환자가 여러 병동에 흩어져있고 그만큼 내가 contact 해야 하는 1년차들도 여러명이다. 이들이랑 유기적인 communication을 해야 내 환자에게 지장이 없다. 혼도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