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993

나를 슬프게 하는 병원 풍경들

이렇게까지 힘들어 하며 생의 마지막 시간을 견디는 그녀. 나보다 훨씬 젊은 그녀의 머리맡에 놓인 2살이 안된 똘망똘망한 아들의 사진. 콧줄에서, 복수때문에 가지고 있는 관에서, 오늘 끼운 소변줄에서 스멀스멀 멈추지 않고 나오는 붉은 피. 설사가 심한 약도 아닌데 항암제만 썼다하면 멈추지 않는 설사로 자꾸 입원하는 부인. 한달에 입원해 있는 시간이 집에 가 있는 시간보다 더 긴 그녀를 위해 병원으로 퇴근하는 남편, 뭔가 가득 들어있는 배낭을 짊어진 그의 뒷모습. 어머니의 임종을 앞두고 초조한 아들, 몇일째 제대로 씻지도 못한 듯 푸석푸석한 얼굴. 주차장 뒷켠에서 그의 등뒤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뇌 수술 후 깨어나지 않는 뇌기능. 그녀의 초점없는 눈동자. 바싹 마른 입. 그리고 찢어진 입꼬리에 맺혀 있는..

한 마디

그녀가 퇴원한건 몇 일전이다. 복수 조절을 위해 임시적으로 관을 넣고 잘 못 먹으니 영양제 맞고 약을 바꿔 항암치료를 시작해 볼까 하는데 환자가 몇일 더 쉬었다가 치료를 했으면 한다고 했다. 나도 동의했다. 이번에 젬자를 많고 전신무력감이 심하게 왔다. 좀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 그렇게 3일 정도 입원했다가 퇴원했다. 걸어서. 혼자. 그녀는 재발된 전이성 유방암으로 5년이 넘게 치료 받고 있었다. 좀 나빠져도 항암치료를 하면 다시 좋아지고 또 운이 닿아 신약 임상연구에 참여할 기회도 많아 여러가지 신약을 많이 쓸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그렇지만 약을 쓰면 좋아져도 시간이 지나 저항성이 생기면 또 나빠지기를 반복. 그러나 그녀는 컨디션이 좋았다. 병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도 초달관 스타일. 이번 약..

내 인생의 타율

전 야구를 아주 좋아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프로야구가 출범을 했는데 그때 전 주말마다 야구장 다니는게 취미였어요. 저는 해태 타이거스 팬이었어죠. 외인구단 해태. 원년 멤버들 정말 끝내줬어요. 그때 야구단 회원이라고 나눠준 소책자에 선수들 프로필이 소개되어 있었는데 그걸 다 외우고 다녔죠. 누가 언제 결혼하고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백넘버는 몇 번인지, 이상형은 어떤지 그런 걸 다 외웠다니깐요. 혼자 테니스공을 잡고 투수 폼을 흉내내며 공던지는 연습도 하고 동생 야구글러브로 벽에 공던지고 받는 연습도 하고 그랬어요. 전 이상윤 투구폼이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실재 남자애들하고 야구시합을 해 본 적은 없었죠. 왜냐면 타격연습을 할 기회가 없어서 타자로 나설 자신이 없었거든요. 도무지 이 방망이로..

졸업 축사

한국 임상 암학회 내 유방암 분과 모임이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에 있는데 여기 가면 유방암을 주로 보시는 다른 병원 선생님들을 만나게 된다. 어쩌면 우리 병원 우리 과에서 다른 암을 진료하시는 선생님들보다 유방암 분과에서 만나는 다른 병원 선생님들이 제 심정을 잘 이해하실지도 모르겠다. 같은 병을 진료하는 의사라서 쉽게 공감대가 형성된다. 아, 그거! 척 하면 척 통한다. 그런 느낌을 받기 때문에 난 이 모임에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나간다. 위로도 받고 도움도 얻을 수 있으니 내가 기다리는 모임이기도 하다. 아마 그만큼 유방암 환자를 진료한다는 것은 다른 암과 다른 어떤 특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방암은 쓸 수 있는 약제도 매우 다양하고 - 항암제, 항호르몬제, 표적치료제 같은 유방암이지만 호르몬, ..

아름다운 산행

저는 환자 진료 기록을 작성할 때 암과 관련된 사항을 제일 먼저 정리하고 그 다음으로 이 환자가 가지고 있는 다른 질환을 나름 임상적 중요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서로 정리를 합니다. 예를 들면 #1. Breast cancer, Lt 최초 유방암 상태 : 언제 수술하고 방사선 하고 항암하고 ER PR HER2가 어떻고 기타 최초 정보 #2. Recurred breast cancer 어디어디 재발하고 어디는 다시 수술했고 방사선치료 했고 비뇨기과 스텐트 넣고 카테터 넣고 어떤 순서로 항암치료 했는지 #3. DM, HTN 당뇨 고혈압 등 기타 심각한 만성질환과 현재 복용중인 약 #4. s/p cholecystectomy due to GB stone osteoporosis (2012.10. BMD L-spine..

머리도 훈련하면 좋아질까요?

케모 브레인(chemo brai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항암치료를 하고 나면 항암제의 부작용으로 인해 뇌 신경세포가 손상되면서 뇌 기능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대표적인 증상은 단기/장기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 그리고 무슨 생각이나 말을 할려고 하는데 술술 잘 안 풀리는 느낌이 나는 것 혹은 느려지는 것 그런 반응입니다. 이번 Breast Cancer and Research Treatment 10월호에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유방암 치료 후 뇌기능 활성화를 돕는 연구가 소개 되었습니다. Advanced cognitive training for breast cancer survivors : a randomized controlled trial. Diane Von Ah et al Br..

동영상으로 엄마를 찍는 아들

아주 아주 착한 아들이 있다. 원래 그는 취업 준비 중이었다. 1년전 엄마가 전이성 대장암을 진단받은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빠짐없이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다닌다. 증상에 따라 진통제 용량이 바뀌니까 진통제 복용일지도 잘 적어 온다. 엄마가 불편한 곳이 많아 약도 엄청 다양하고 많은데, 그걸 종류별로 잘 챙긴다. 어떤 증상 때문에 약을 더 드셨으니까 그 약은 몇일치가 부족하고 어떤 증상은 요즘 호전되서 약을 안 먹고 있으니 처방 안해줘도 되고 때에 따라 약 처방 일수가 넘치기도 하고 부족하기도 한데 그런걸 아주 꼼꼼히 아주 잘 챙긴다. 흉수 복수 관이 있을 땐 그 소독도 자기가 챙긴다. 엄마가 이것저것 투정을 많이 부리는데 마치 오빠처럼 그 투정을 다 받아주며 엄마 수발을 들어주었다. 그러던 엄마가..

인플루엔자 예방접종

백신 접종과 관련하여 문의사항이 많아 공지합니다! 원칙 1. 1. 인플루엔자 백신은 매년 10월 - 11월에 1회 접종합니다. 이건 매년하는 겁니다. 2. 폐렴구균백신 23개 폐렴사슬알균 백신을 접종하고, 전이성유방암 환자의 경우 5년 후 재접종 합니다. 수술 후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는 올해 한번만 하시면 됩니다. 수술 후 1년 허셉틴 맞는 분들 중 작년에 폐렴구균백신을 접종한 환자는 올해 안해도 되고, 작년에 안한 분들은 올해 하세요. 3. 비장절제술을 받은 경우 B형 헤모필루스 백신을 같이 접종하세요. 원칙 2. 첫 항암치료 시작 2주 전에 예방접종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항암치료 전에 백신을 접종하지 못한 경우, 항암치료 종결 3개월 후에 접종하시면 됩니다.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중에 인플루엔자 백..

약한 고리

병은 우리 삶의 약한 고리를 노출시킨다. 꾹꾹 묻어놓고 잘 덮어두고 살았는데 암을 진단받고 보니 그렇게 묻어두고 덮어두었던 문제들이 다 폭발하는 것 같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까... 그들 부부는 방문객이 별로 없다. 남편 수발은 오로지 부인이 다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재혼한 부부다. 그래서 각자 당신들의 장성한 자녀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병원에 안온다. 뭔가 가족 내 앙금이 있는 것 같다. 이제 막 암 진단을 받았지만 환자는 항암치료를 시작하기에도 어려움이 많다. 어쩌면 아무런 치료도 시도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50대 초반의 부인, 그녀의 몸에도 여러 신호가 온다. 부정맥도 생긴 것 같고 가끔 숨도 차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높고 몸도 자꾸 붓고 그녀도 건강검진 한번 받아봐야 겠다 그러던..

체험학습

전이성 유방암으로 치료 중인 나의 환자. 내가 보기엔 아슬아슬한데 환자는 씩씩하다. 호르몬 치료가 잘 되어서 안정적이었던 기간, 항암제를 썼는데 약이 잘 듣지 않았던 기간, 지금은 젤로다 먹는 약으로 10 cycle을 넘기고 안정적으로 치료 받는 기간. 종양 표지자도 많이 감소하고 환자도 불편한 증상이 거의 없어졌다. 비록 아직 병은 남아있지만... 그리고 그녀는 얼마전 직장으로 복귀하였다. 그래서 오늘 토요일 진료를 보러 왔다. 그녀에겐 고3 아들과 초등학교 3학년 딸이 있다. 엄마가 아프니 아이들도 일찍 철이 들었는지, 아들은 오늘 예식장에 아르바이트 하러 갔고 딸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며 엄마를 위해 기도한다고 한다. 진료 끝나고 나가보니 남편도 함께 오셔서 부인의 진료비를 계산하고 계신다. 눈물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