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죽음을 준비하는 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약한 고리

슬기엄마 2012. 10. 14. 08:37

 

 

병은

우리 삶의 약한 고리를 노출시킨다.

꾹꾹 묻어놓고 잘 덮어두고 살았는데

암을 진단받고 보니

그렇게 묻어두고 덮어두었던 문제들이 다 폭발하는 것 같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까...

 

그들 부부는 방문객이 별로 없다.

남편 수발은 오로지 부인이 다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재혼한 부부다. 그래서 각자 당신들의 장성한 자녀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병원에 안온다. 뭔가 가족 내 앙금이 있는 것 같다.

 

이제 막 암 진단을 받았지만

환자는 항암치료를 시작하기에도 어려움이 많다.

어쩌면 아무런 치료도 시도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50대 초반의 부인, 그녀의 몸에도 여러 신호가 온다.

부정맥도 생긴 것 같고

가끔 숨도 차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높고

몸도 자꾸 붓고

그녀도 건강검진 한번 받아봐야 겠다 그러던 참인데

남편이 먼저 덜컥 암을 진단받는 바람에 자기 몸은 챙길 여가가 없다.

 

보호자 침대에서 쪽잠자는 생활을 몇일 했더니 컨디션이 너무 나쁘다.

남편 곁을 한시도 떠날 수가 없다. 밤에도 자꾸 깨는 남편 때문에 부인도 잠을 푹 자지 못한다.

 

그들 부부에게 우리병원 호스피스팀이 연결되었다.

보호자가 쉴 시간을 주기 위해

자원봉사자가 하루 서너 시간 부인을 대신하여 간병을 해 주기로 했다.

몸 컨디션도 않좋으니 낯선 사람과 함께 그 시간을 보내야 하는 환자도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조금씩 적응하게 되었고

그 시간 동안 부인이 휴식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낯선 이라고 생각했던 자원봉사자가

팅팅 부은 자기 발을 맛사지해주는 걸 보니 남같지 않다.

스킨쉽이 주는 눈물나는 고마움.

 

그렇게 주어진 시간 동안

부인은

우리병원 가정의학과에서 기본 진료를 받고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전문과로 연결되었다. 검사도 하러다니고 약도 먹기 시작했다.

 

환자는 자살 충동이 있었다.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드니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었나 보다.

그러나 그 마음의 이면에는 그만큼 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 마음을 부인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하고 품고 있었다.

 

재혼 후 살아온 10년의 시간. 고달프기도 하고 좋기도 했던 그 시간들.

이제 그 마지막 무렵이 다가온다. 남은 시간이 얼마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들의 삶은 충분히 최선을 다한 것이었음을,

어렵지만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는,

그리하여 서로의 마음에 충만한 사랑이 남을 수 있다면

그 시간의 길이가 얼마인지가

중요하겠는가.

 

병은 우리 삶의 약한 고리를 노출시키지만

어쩌면

그 과정에서 더 강한 사랑을 깨닫는 기회를 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