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993

이번 추석 연휴기간에는

아침 회진을 돌고나니 이제 한적한 연휴의 시작이구나 싶습니다. 저도 이제 시댁에 가야죠. 저는 무늬만 며느리라 이런 명절이면 죄책감(!)이 좀 커집니다. 그래도 저희 시댁에는 일이 아주 많지 않고 시부모님도 이미 십수년째 이렇게 살고 있는 저의 생활을 잘 이해해주시기 때문에 올해라고 새삼, 명절이라고 새삼, 뭐 별건 없습니다. 대신 저는 책을 몇권 골랐습니다. 무슨 교훈이나 정보를 얻을려고 하는 책들은 아닙니다. 그냥 재미있는 책,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는 책들입니다. '혼자 책 읽는 시간' : 제목이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저도 이번 연휴, 혼자 책 읽는 시간에 혼자 책 읽는 시간을 읽을려구요. '월든' : 이런 삶을 꿈꿔요.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 : 시오노 나나미 좋아해요. 읽다가 ..

백팔배

요즘 매일 백팔배를 하고 있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매트를 깔고 그녀에게 절하는 동작을 배워 봅니다. 꼭 무릎에 방석을 대고 해야된다는 팁도 얻었습니다. 안그러면 무릎이 까져서 두달동안 백팔배를 다시 시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대요. 백팔배 동작은 의외로 정성어린 스트레칭 동작입니다. 제가 취미삼아 등산을 다니고는 있지만, 의도적으로 근육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안쓰고 있는 근육이 많았나 봅니다. 팔을 쭉쭉 뻗어 합장을 하고 90도로 엎드리고 절을 하면서 깊은 등근육이 자극되는지 몸 곳곳이 시원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일어설 때가 제일 문제인데 온전히 자기 하지의 다리 힘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이게 아마도 이 백팔배에서 큰 고비가 되는 동작인것 같습니다. 삶의 어려운 시기, 그 굴곡을 넘어가는..

추석 선물

추석이라고 선물을 주십니다. 잔잔하고 정성스러운 선물이 많습니다. 사실 평소에도 전 환자들의 선물을 많이 받습니다. 먹을게 제일 많습니다. 같은 아줌마들끼리라서 그런지 손수 농사지은 야채부터 당신 사는 곳 특산물이라는 미역 피로회복과 두뇌회전에 도움이 된다는 견과류 블루베리 홍삼 같은 건강보조식품도 있습니다. 진료 중에 먹으라고 따뜻한 원두커피 한잔 또 커피와 같이 먹으라고 쿠키 환자들과 같이 먹으라고 초콜렛 손수 지은 밥으로 만들어 오신 점심 도시락 직접 쪄 온 만두 일하느라 부엌일 할 시간 없을 거라며 밑반찬을 해다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친정어머니 같습니다. 외국 여행 다녀오시면서 사오신 립스틱 가끔 양말이나 속옷, 수건도 있습니다. 제가 병원에서 살면서 꼭 필요한 아이템인지를 아시나 봅니다. ^^ ..

차라리 무관심으로

명절날 일하지 마세요. 일하면 팔 부으니까. 일 하면 쉽게 피로해지니까 일하지 마세요. 어떻게 한국 여자가 명절날 일을 안할 수 있겠어요. 내가 해 놓고도 부질없는 말이다. 오른쪽 유방암을 수술한 환자. 오른손잡이인 환자는 나도 모르게 손을 쓰게 되고 림프부종이 자꾸 재발한다. 우리집에서 차례를 지내지 않아도 이것저것 일이 많고 부산해 지는게 명절인데 한집 살림을 도맡아하는 여인네가 추석날 일을 안하고 어떻게 하루를 보낼 수 있겠는가. 겉으로 드러나게 장애가 보이는게 아니니까 아무도 안 알아준다. 나도 내가 유방암 환자라는 걸 별로 티내고 싶지 않다. 못 알아채면 다행이다. 모른척 해주면 고맙다. 다들 처음에는 관심을 가져주는 것 같지만, 결국 남의 일이라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사실 시들해지기만 하면 다..

좋아졌네요

그녀는 처음 유방암 진단, 수술 전 항암치료를 결정했을 때부터 항암치료 중간에 병이 나빠져 미쳐 계획된 항암치료를 다 받지도 못한 채 수술을 받아야 했던 순간 유방 수술을 하면서 같이 검사한 폐 조직검사에 전이가 나와 갑자기 4기로 진단되었던 순간 항암제 부작용으로 고생하며 멀지 지방서 앰뷸란스 타고 우리병원 응급실에 와야 했던 순간 약을 써도 병이 나빠지기만 하던 시간 그 시간들을 모두 나와 함께 했다. 진단, 재발, 전이 등의 무서운 소식을 내가 모두 전했다. 그녀는 때론 울고 때론 나를 원망하고 때론 자신을 원망하였지만 나를 떠나지 않고 나를 믿어주었다. 그녀는 내 앞에서 울지 않았다. 늘 괜찮다고 했다. 내가 어렵게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면 잘 되겠죠 했다. 지방에서 서울을 오가며 고생도 많이 했..

엄마가 유일하게 물려준 것은 - 슬기의 일기 9

계절이 바뀌는 것은 내 몸이 제일 먼저 알아차린다. 환절기가 되는 순간 눈물이 나기 시작한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수업시간에도, 청소를 하는 동안에도, 책을 읽을 때도, 자기 직전까지 발작적인 눈물과 콧물이 끊임없이 나를 공격한다. 매일 저녁 알레르기 약을 먹고 자지만, 그 때뿐이다. 원래 그렇다고 한다. 학원에서도 쉴 새 없이 코를 훌쩍이다 보니 여간 눈치가 보이는 게 아니다. 눈치가 보이는 것을 넘어 너무 힘들다.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 콧물을 닦아내다 보니 늘 코가 헐어있다. 친구와 얘길 하다가도, “잠깐만…” 하며 휴지를 찾아 싸해진 코를 틀어막아야 한다. 학교가 산 옆이라 더 심하다. 수업에 집중하고 싶어도 정발산 푸른 정기를 따라 내려오는 여러 종류의 꽃가루가 친구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재..

환자의 칭찬에 목이 메이다

우리 병원에는 친절 직원 추천제도가 있다. 환자들이 해주는 것이다. 어떤 환자가 나를 친절 직원으로 추천해주면 그가 쓴 추천의 이유가 나에게 메일로 온다. 익명의 누군가일 때도 있고 환자의 이름을 알 수 있을 때도 있다. 추천의 이유를 읽고 있으면,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그가 누구인지 알면 특히 더 그렇다. 그 생명의 불꽃이 어느 정도 남아있을지 짐작이 될 때가 많기 때문에 그럴 때가 있다. 나를 칭찬해주는 문구를 내가 볼 때 사실 좀 오그라든다. 나라는 사람의 본질에 그리 그렇게 대단한 것이 없다는 것을 나 스스로 잘 알고 있는데, 환자들이 나를 친절하다고, 좋게 표현하는 내면에 나를 향한 환자마음의 기대감이 있기 때문일 때도 있다. 선생님, 저를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저를 위해 최선을 다해..

연구자 미팅 다녀왔습니다

지난 4일간 병원을 비우고 영국 런던에 연구자 미팅에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블로그 글도 못 쓰고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네요. 세계적인 임상연구가 시작될 때는 이렇게 연구자 미팅을 해서 임상연구의 이론적 배경을 설명하고 현실적으로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요즘 한국은 국제적으로 진행되는 여러 임상연구를 집약적이고 효과적으로 잘 수행하는 국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을 개발한 다국적 제약회사에서는 가능한 한국을 포함하여 임상연구를 진행하기위해 여러 한국의 의사들을 불러모아 이렇게 미팅을 하고 있습니다. 실재로 성공적인 대규모 임상연구에 우리나라 병원의 참여율과 환자 등록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우리 병원도 그런 병원 중의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

불안과 우울함, 우리의 그림자

행복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 한구석에 늘 불안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애써 구석에 구석에 밀쳐두고 숨겨두었는데, 때만 되면 슬그머니 기어나옵니다. 그리고 활개를 치죠. 그렇게 불안이 한번 지나가고 나면 뒤따라 우울함도 나를 흔들어 놓고 갑니다. 병이 있는 환자만 그런 걸까요? 암환자만 그런 걸까요? 아닙니다. 저도 그래요. 그렇게 마음이 와동을 치면 뭐가 되었든 내 마음을 잡아줄 것을 찾아 헤맵니다. 찾지 못해 술도 마시고 방황도 합니다. 이제 치료를 마쳤으니 잘 지내세요 수술한 환자의 항암치료를 마치고 나면 나는 속이 후련한데 - 아이고, 이제 이 환자 치료 끝났네 - 정작 환자는 불안합니다 - 과연 난 완치된 걸까? 재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걸까? - ..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가 평소 존경하던 선생님의 장인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받았다. 장인어른의 상까지 내가 문상을 가야하나?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 여지없이, 문자를 받자 마자 장례식장을 찾았다. 이제 막 영정사진이 자리를 잡은 장례식. 나는 그 초입에 인사를 하러 간 사람이 되었다. 선생님은 내과 선생님이시지만 지금은 파트도 다르고 환자 관련해서 뵐 일도 거의 없는 위치에 계신다. 병원 보직을 맡으셔서 바쁘시기도 하지만 나같은 피래미는 선생님 그림자도 접할 일이 없다. 그런데도 장례식장을 찾은 이유는 내가 마음으로 진정 존경하는 선생님이기 때문에. 우리 선생님은 모든 내과 레지던트들의 결혼식에 직접 가신다. 결혼식 전에 청첩장을 가지고 찾아가서 미리 인사를 하지 않아도 선생님은 직접 결혼식장을 찾으신다. 다 내 후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