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세가 넘으신 할아버지
드물지만 남자 유방암 환자시다.
할아버지, 외모로만 치면 60대로도 보이지 않아요
내가 그렇게 말씀드리면 아주 좋아하신다.
나 듣기 좋은 말만 해줄려고 한다며 핀잔이지만, 정작 온 얼굴 웃음 가득이다.
실재 강원도에서 농사짓고 사시는데, 얼굴이 구릿빛으로 그을린 것도 멋있고, 인상도 좋으시고
전혀 70대 노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유방암 수술 후 3년만에 재발,
전이성 유방암을 진단받은지 또 3년이 지났다.
폐로 전이된 암은 아주 조금씩 조금씩 나빠지고 있었다. 병이 좀 나빠져도 정작 할아버지는 느끼는 증상이 별로 없다. 항호르몬 치료를 유지하는데, 폐 전이가 점점 커지고 종양 수치도 계속 증가해서 5개월전 젤로다로 바꾸었다. 젤로다를 바꾼지 3개월만에 검사했는데, 종양표지자 수치가 뚝 떨어졌다. CT 상으로도 좀 좋아졌다.
그냥 종양 자체가 진행 속도가 느린 양순한 놈인가 보다.
당신은 지금 가족도 없고 자식도 없다고 하신다.
유방암 진단 전까지는 서울에서 기업체에 다니셨다고 하는데 더 여쭤보지는 않았다.
병원도 늘 혼자 오신다. 가족들과 같이 한번 오시라고 하니, 가족 없다고 딱 잘라 말하신다. 더 안 여쭤봤다.
오늘은 안경을 쓰고 오셨다.
젤로다 쓰면서 시력이 많이 약해진것 같다.
수족증후군도 심해서 손발이 많이 벗겨진다. 농사짓는데 수족증후군 때문에 너무 불편하다고 나한테 이만저만 불평불만을 토로하시는게 아니다. 또 젤로다 먹으면서 얼굴도 더 까매진것 같다고, 아닌척 하면서 외모에 신경쓰시는 할아버지, 여간 불평불만이 많다. 그거 진정시키느라 외래 시간이 다 간다.
근데,
나 내년 농사 준비 해도 되?
나에게 오기 전 할아버지는 다른 병원에서 이미 효과적인 약 3가지 종류를 다 쓰고 오셨다. 남은 약이 있기는 하지만, 더 나빠지고 주사항암제 쓰기 시작하면 활동성이 많이 떨어질 것도 같다. 매주 병원 와야 하는 약도 많다. 춘천에서 다니시기 어려울 것 같다.
내년 준비할려면 지금 모종도 사고 해야 하는데, 내년 농사 준비를 할지 말지 물어보신다. 농사 준비해 놨다가 죽을까봐. 그럼 그 작물들 어떻게 하냐고. 그래서 죽을 것 같으면 내년 농사 준비 안 할려고 하신단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뭐 하실건데요?
고추, 깻잎, 고구마, 옥수수 그런거 할려구.
하세요.
그리고 농사지어서 저한테도 좀 갖다주세요.
안그래도 올해 지은거 다음번에 좀 가지고 올려고 했어. 고구마 좋아해?
네. 좋아해요. 좀 많이 가지고 오세요.
근데 선생님은 왜 CT도 잘 안보여줘?
지난번에 보여드렸잖아요.
그랬나?
미안해.
진료실을 나가신다.
그랬다가 다시 문 열고 들어오신다.
환자가 이런 말도 안되는거 물어보는데
답하느라 고생이 많아.
내 마음 다 알면서도 날 괴롭힌다.
그런데 싫지 않다.
고구마 때문일까?
내년 농사 수확물도 꼭 얻어먹어야 겠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시간이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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