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펠로우일기 45

죽음을 준비하는 길에 정도가 있겠는가...

4년전에 다발성 골수종을 진단받은 64세 할머니. 지난 4년간 3번의 골절로 정형외과 수술을 받으셨다. 다발성 골수종이라는 병의 특징상 제대로 된 면역 글로불린이 형성되지 못하기 때문에 잦은 폐렴과 기타 감염으로 1년에도 수차례 입퇴원을 반복하고 있다. 병이 조절되었다가 안되었다가 하기를 반복하기 때문에 여러 항암제들을 바꿔가며 투여해왔고 최근 들어 전체적으로 병이 악화되는 코스로 진행하시는 것 같다. 최근 다발성 골수종에 효과적인 좋은 약들이 많이 개발되었지만 그 중 일부만이 국내에서 사용가능하고 그나마 약값이 너무 비싸서 왠만한 사람들은 엄두조차 낼 수 없다. 다른 약제에 반응하지 않는 불응성 다발성 골수종에 사용할 수 있는 레날리도마이드라는 약은 하루 한알 먹는데, 한알에 50만원이 넘는다. 한달에..

가정의 달, 가족을 생각하다

가정의 달, 가족을 생각하다 중학생이 된 슬기, 이제 어린이날 선물을 안 챙겨 줘도 되는 청소년이 되었다. ‘쿨하다’는 말을 좋아하는 슬기는 나에게도 상당히 ‘쿨’해서 나를 괴롭히는 일도 없고 특별히 엄마에게 요구하는 것도 없으며 나의 비가정적 생활에 대해서도 이해를 잘 해주는 편이다. ‘자기주도적 학습’을 강조하는 아빠랑 상의해서 학교 공부는 해결하고 있는 것 같다. 슬기가 요즘 학교에서 뭘 배우는지, 학원도 안 다니는데 공부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문제집은 샀는지 난 그런 소소한 사항들은 잘 모른다. 늦게 퇴근했는데 슬기가 아직 안자고 깨어있으면 시간가는지 모르고 수다를 떨고, 수준이 격상된 슬기의 농담에 감동받아 웃다가 괜히 애를 늦게 재우는 나쁜 엄마이다. 슬기와 슬기 아빠는 성격적, 정서적으로 ..

강의는 시작되고 학생은 졸기 시작한다

강의는 시작되고 학생은 졸기 시작한다 의대 수업의 90% 이상은 칠판판서와 필기를 하기보다는 - 요즘이야 의대가 아니더라도 이런 수업을 하는 과가 많지는 않겠지만- 각종 그림과 표로 넘쳐나는 슬라이드를 보면서 진행된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사진과 그림, 표들이 지나가기 때문에 필기는 포기한다. 그냥 되는대로 열심히 듣고 나중에 기억나는 것만 이해해야지 뭐, 누군가 필기를 잘 해놨을거야, 그거나 복사하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화면을 응시하는 수 밖에 없다. 슬라이드 화면이 잘 보이려면 강의실 조명은 최대한 낮추는게 좋다. 특히 엑스레이나 CT 등 영상 사진을 보는게 중요한 수업이라면 완전히 깜깜하게 조명을 끄고 시선을 화면에 집중하도록 하는게 필요하다. 나는 정신집중!을 외치며 빨간 레이저 포인터를 따라 ..

급여 비급여 임의비급여....

“그 환자는 우리 병원에서 오래 치료받은 분이에요. 비급여 약제를 쓰더라도 소송을 걸 가능성이 거의 없으니 본인이 약값을 부담하게 하고 이 약을 쓰겠습니다” “지금 이 약제조합은 사전신청이 들어간 상태니까, 내년에 심의를 통과하면 그때 100:100으로 처방하여 쓰시면 안될까요? 지금 이 약을 쓰면 임의비급여가 됩니다” “아니, 지금 병이 나빠져서 환자가 증상이 심해지고 있는데, 2주 이상 기다리라는 말인가요? 어차피 보험도 안되는 약이고 환자가 자기돈 내고 치료를 받겠다는데도요?” “임의비급여로 처방하시면 불법진료라 소송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환자에게는 이 약이 가장 적절한 선택입니다. 저는 쓰겠습니다” 환자 본인이 비급여로 약값을 전액 지불하더라도 그 처방 항목이 100:100이..

학회에서 '꼼수'를 나누는 교수님들

난 학회에 가면 구석에 숨어 열심히 필기하고 강의를 듣는 편에 속한다. 교수님들은 잘 모르더라도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시지만, 질문도 실력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질문 제대로 못했다가 바보되는 거 많이 봤다. 아직은 구석에 찌그러져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내 수준에 맞다고 생각하니 하루 빨리 플로어에 나가 당당하게 질문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얼마 전 학회에 갔다가 뒤에 앉았더니 집중도 잘 안되고 화면이 잘 보이지도 않아서 제일 앞줄로 나가서 강의를 듣기로 했다. 앞에 앉으니 강의를 하시는 선생님들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나야 종양학을 공부하겠다고 입문한지 2년째에 불과한 강사 신분. 선생님들 강의를 듣기만 하고 멀찌감치서 뵙던 분들이..

선생님의 가운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나?

선생님의 가운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나? 의사 가운도 패션시대. 우리에게 익숙한, 빳빳하게 풀을 먹인 흰색가운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스타일을 넘어, 은은한 파스텔 톤의 맵시있는 쟈켓 형태나, 세련된 셔츠 형태로 가볍게 변형시킨 여름 가운들도 선 보인다. 내가 세브란스 병원 레지던트로 일할 때는 무릎 위 정도의 길이로 된 긴 가운을 입었고 교수님이나 임상강사들은 자켓처럼 짧은 가운을 입었기 때문에, 멀리서 짧은 흰 자켓이 보이면 ‘아, 높은 선생님들인가보다’ 알 수 있었다. 몸에 딱 붙는 맵시있는 짧은 가운이 꽤 부러워 보였다. 나도 전문의가 되면 저렇게 폼 나는 가운을 입을 수 있겠구나… 아쉽게도 지금 일하는 삼서서울병원은 전공의나 교수님이나 임상연구센터 연구원이나 다 같은 스타일의 가운을 입으니 폼 잡을 ..

나를 위한 기도

나를 위한 기도 나는 천주교 신자이다. 그러나 믿음이 아주 깊지도 않고 성당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며 내 생활 자체가 종교성이 강하지도 않다. (하느님, 죄송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주말미사를 참석하는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신자의 의무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난 사실 지난 8개월 동안 주말미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심지어 12월에는 성탄미사도 안 봤는데, 안 봤다고 해서 마음이 아주 괴롭거나 몹쓸 짓을 했다는 죄책감도 크게 심하지 않다. (하느님, 정말 죄송합니다). 솔직히 성당을 안가면 슬기와 엄마가 나를 아주 몹쓸 사람 취급하기 때문에 눈치를 보며 가는 측면이 강하다. (엄마, 죄송해요.) 나는 그렇게 나이롱 신자이지만, 그 나이롱 끈이라도 놓지 않고 살려고 하는 것은, 병원에서 지내다보면 인간의 한..

슈퍼맨 할머니 파이팅!

슈퍼맨 할머니 파이팅! 내가 만나는 환자들은 대부분 4기 암환자이다. 4기 암환자라는 진단을 받으면,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고 치료받고 ‘암환자로 살아가기’까지 환자들은 눈물겨운 투쟁과 아픔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잘 이겨내고 슈퍼맨으로 거듭나는 분들이 있다. 75세가 넘은 할머니, 유방암을 처음 진단받고 수술받은 것이 1992년이니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이다. 첫 수술 후 7년째 되던 해에 유방암이 있던 쪽 흉곽에서 병이 재발하여 재수술을 하고 첫 항암치료를 받았다. 그로부터 5년 후 이번에는 흉골뼈와 주위 림프절로 전이된 병이 발견되었고 환자는 국소 방사선 치료를 시작하였고 추가적인 항암제를 쓰지 않고도 호르몬제만 유지하면서 병이 잘 조절되는 듯 하다가 3년이 지난 2007년에는 드..

슬기엄마는 종지엄마

슬기엄마는 종지엄마 내가 의과대학을 입학하던 2000년 슬기는 만세살이 안된 꼬맹이었다. 아장아장 걸어다니고 오물오물 말하던 귀여운 슬기가 올해 중학생이 된 것이다. 아이들이란 그야말로 productive 하게 쑥쑥 자라고 발전하고 성장하기 때문에, 때묻고 집중력없고 퇴보하는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볼 때마다 정말 경이로운 변화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난 작년부터 슬기에게 여러 모로 공격을 당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간장종지’엄마가 된 것이었다. 슬기는 급격히 성장하여 인간과 세상의 이치에 대한 주제로 나와 대등한 대화를 나누거나 때론 나보다 사건의 정곡을 찌르는 분석력을 보여주는 등 사고의 깊이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데, 나는 표피적으로 이해하고 즉자적으로 반응하는 절지동물 수준으로 전..

아직도 의사와 환자 사이의 거리는 멀다

아직도 의사와 환자 사이의 거리는 멀다 의사가 되어 좋은 것 중 하나는 오랫동안 연락없이 지내던 지인들이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연락을 해 온다는 것이다. 그 지인이라는 분이 나랑 별로 친하지 않거나 내가 불편해하던 사람이라면 얘기가 다르지만, 대개의 지인들은 연락없이 지내다가 자기가 아쉬울 때 전화를 한다는 생각에 매우 미안해 하며 전화를 할 정도의 예의가 있는 사람들이라 나로서는 반가운 마음이 먼저다. 내가 먼저 인사를 드리고 지냈어야 하는 분들도 있는데, 오히려 그분들이 나에게 미안해하니 나로서는 잠자코 있기만 하면 예의를 갖추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들의 도움 요청에 내가 별 도움이 안될 때,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일 때, 나도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고 거쳐야 할 때는 대략 난감이지만, 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