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993

재원 일수

큰 병원에서는 입원과 퇴원의 원칙이 있습니다. 국제적인 평가기준에서도 질환별로 재원일수를 규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폐렴으로 입원한 환자의 재원일수는 7일을 넘지 않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7일 이내에 폐렴의 급성치료를 하고 급성기를 넘기면 먹는 항생제와 기타 보조 약제를 가지고 퇴원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 노력이 전체적인 보건의료비용을 줄이고 환자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은데 무리하게 퇴원을 강행하면 안되지만, 일정 정도의 기준에 맞추어 재원일수를 단축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전세계적으로 우리나라처럼 높은 의료서비스 질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병원 이용 비용이 저렴한 나라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같은 상병명으로 비교하면 입원일수가 ..

그녀의 세번째 시집

뇌로 전이된 후 수술을 하고도 한동안 말이 어눌하다. 생각보다 회복이 늦다. 두 번째 뇌 전이다. 처음 유방암은 지금으로부터 10년전. 첫 재발은 지금으로부터 5년전. 그때는 재수술을 하여 완치를 노렸건만 3년전 폐로 재발하였다. 그렇지만 전이성 유방암 첫 치료로 꽤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치료가 잘 되던 중이었다. 뇌전이가 있었지만 감마 나이프 하고 2년 이상 안정적으로 잘 지냈다. 그러던 중에 소뇌로 크게 전이가 되어 그녀도 나도 많이 놀랐었다. 신경외과에서 수술을 받은 후 회복하고 온 외래. 선생님, 나 쓸 약은 있어요? 나 이러고도 살 수는 있으려나? 그녀를 보는 내 마음이 철렁하다. 그녀는 힘들고 무섭고 절망스러운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면서도 사람 운명이라는게 하늘의 뜻 아니냐는 낙천적인 모습을 보여..

미리 받는 성탄절 카드

외래를 다니는 암환자들은 대개 3주 단위로 치료를 받는다. 이번 주 외래에 오신 환자들의 다음 주기는 새해이다. 올 한해가 3주도 안남았다는 싸인이다.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성탄절 카드를 주고 가시는 분들도 있다. 키보드에 익숙해져 손글씨를 쓰는게 어색해진 나, 가끔 편지나 카드를 쓸 때면 어찌나 손이 떨리고 글씨도 삐뚤빼뚤 엉망인지 몇번을 망치기 일쑤다. 그래서 정성껏 마음을 담아 또박또박 눌러쓴 환자들의 글씨를 보면 새삼 그 정성을 느낄 수 있다. 어색한 듯 카드 한장. 어색한 듯 사과 한개. 어색한 듯 커피 한잔. 쑥스럽게 선물을 내밀고 간 환자들의 마음이 징하게 고맙다. 그렇게 나에게 뭔가를 주고 싶어하는데 정작 선물을 받는 나는 썰렁한 초콜렛 한개, 아니면 항암제로 그 마음에 답한다. 때때로 ..

Proton Pump Inhibitor 에 대한 단상

속쓰릴 때 쓸 수 있는 여러가지 소화기 약제 중에 Proton Pump Inhibitor (PPI, 프로톤펌프 억제제) 라는 약이 있습니다. 이 약은 위점막 세포표면에 위치하여 위산 방출을 조절하는 프로톤펌프라는 기관의 역할을 억제하는 기능을 합니다. 주사약과 먹는약이 있는데 속이 너무 쓰릴 때 PPI를 주사약으로 쓰면 아주 빠른 시간에 속쓰림 증상이 좋아지는 걸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으로는 아주 놀라운 효과였습니다. PPI는 위궤양, 역류성 식도염에 매우 효과적인 약제입니다. 다만 이 약제를 보험으로 쓰기 위해서는 내시경으로 특정 질환(위궤양, 십이지장궤쟝, 위식도역류질환 등)이 입증이 되어야 합니다. 내시경 소견은 없으나 임상증상이 유사하면 원래 용량의 반 용량을 제한적인 짧은 기간 내에 쓸..

기다려지는 그녀

3주마다 한번씩 허셉틴을 맞으러 오는 그녀. 벌써 4년이 넘었다. 그녀는 항상 예정시간보다 일찍 와서 진료를 기다린다. 오늘처럼 추운 날, 새벽기차를 타고 선잠을 자며 올라왔을텐데 진료실에 들어서는 그녀의 얼굴은 밝고 화사하다. 원래 미인이기도 하고, 항상 세련된 옷차람과 화장으로 그 미모가 더해진 탓도 있겠지만 그녀의 가장 큰 매력은 친정엄마같은 넉넉한 마음씀씀이다. 진료실에 들어서면 그녀는 내 안색을 살피면서 3주 전보다 얼굴색이 좋아졌다는 둥 얼굴에 뭐가 많이 났다는 둥 나의 안부를 소소히 챙기신다. 내가 그녀의 안부를 묻기 전에 그녀가 나의 안부를 먼저 묻는다. 그녀는 짧은 외래 시간 동안에도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모르는 나의 한쪽 귀걸이 자리의 피부가 성했다 가라앉았다 하는 것도 알고 있..

이 환자가 약 먹는 법

72세 할머니. 수술 후 2년만에 수술부위와 주위 목 림프절로 재발이 되었다. 재발된 위치는 대개 유방 근처인것 같지만 엄밀하게 병기를 따지면 목 근처 림프절은 원격전이의 위치에 해당하기 때문에 전이성 유방암으로 보는게 맞다. 다행히 컨디션이 좋으신 편이라 광범위하게 시행한 유방 및 근처 림프절 절제술을 잘 견디셨다. 일단 급한 불은 껐다. 그렇지만 이후 항암치료를 추가적으로 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해야 했다. 할머니는 삼중음성유방암이라 항호르몬제를 쓸 수 없다. 할머니 컨디션이 좋고 씩씩하셔서 나는 할머니에게 항암치료를 해보자고 했다. 항암치료에 대해 가족과 상의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필요없다고 하신다. 내가 이렇게 정정한데 내 목숨을 왜 자식들하고 상의하냐며. 할머니는 이미 2년전에 아드라이마이신과 ..

환자로부터 온 따뜻한 메시지 한편

오늘 같은 날 난로불 같이 따뜻한 당신이 있어 세상은 행복합니다. 오늘 참 많이 춥죠? 추운 날씨지만 마음은 따뜻한 하루 보내시라고 커피 한 잔에 행복을 가득 담아 보내드립니다. 건강하세요. 아마 환자가 인터넷을 보다가 찾아낸 글귀인것 같다. 카톡으로 나에게 URL을 붙여서 메시지로 보내주셨다. 좋은 글귀가 있으니, 나와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드셨나 보다. 평범한 문구인데 마음이 따뜻해진다. 계획해도 계획대로 살아지지 않는게 우리의 운명. 아둥바둥 열심히 해도 무엇때문에 그리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목표가 확실하지 않다면 열심히 사는 바쁜 생활을 무의미하다. 자전거 패달을 열심히 밟아도 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이겠지. 더디더라도 지금 내가 왜,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되돌..

환자를 안 보니 글이 안 써지네요

지난주에 미국에서 열린 유방암 학회를 다녀왔는데 처음 의욕같아서는 매일매일 학회에서 공부하고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을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리는 게 목표였어요. 학회에서 발표되는 모든 내용을 섭렵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이해한 만큼 조금 어려운 내용이더라도 앞으로 장차 내가 공부할 주제들을 챙겨보면서 차곡차곡 정리하려고 했었죠. 실재 환자를 진료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연구 성과들이 이론적인 측면을 넘어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어요. 글로 정리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환자를 안 보니까 글이 잘 안써지네요. 마음에 하고 싶은 말이 별로 쌓이지 않아요. 원래 제가 블로그에 글을 쓸 때는 수돗물을 튼 것처럼 쏴 하고 마음에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넘칠 때 글을 쓰는데, 환자를 안..

From San Antonio (2) - tumor dormancy and recurrence

유방암을 진단하면 눈에 보이는 암을 수술적으로 제거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수술 주위 병변과 주위 림프절을 어느 정도 포함하여 방사선치료를 한다. 수술과 방사선치료는 국소적 치료(local therapy) 인데 비해 항암치료는 전신치료 (systemic therapy) 이다. 그래서 항암치료 혹은 항호르몬 치료는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혈관을 따라 온 몸의 어딘가에 떠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미세전이 (micrometastasis) 세포를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모든 환자에서 미세전이가 있는걸까? --> No 미세전이가 있다는 것을 어떤 방법을 통해 입증할 수 있는가? --> 아직까지 실험적인 몇몇 방법이 개발되고 있기는 하나, 아직 실험적인 수준이며, 환자들에게 직접 적용할 수는 없는..

From San Antonio (1)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혹은 말하지 않는 예전에 비해 많이 개방적인 분위기가 되었다고 하나 환자들과의 만남에서 성의 문제는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하거나 후순위로 밀리는 것이 아직까지의 솔직한 수준입니다. 저도 구차하지만 핑계를 대자면 의사인 제 머리 속은 이미 결정해야 할 다른 주제들로 가득 차 있고 안그래도 시간 없는데 환자들 성에 대한 문제까지 내가 굳이 얘기해야 하나 싶은 마음도 들고 --> 사실 이게 제일 큽니다. 이런 문제를 일반 진료시간 내에 상의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괜히 이야기를 꺼내면 대화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에 비해 정답도 없는 문제를 들쑤시기만 할 것 같아 피하고 싶고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고 딱히 내가 대안을 제안할 수도 없고 우리 병원에서 이런 성문제를 전담하여 진료하는 전문 선생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