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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후를 긍정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의 문제점

최초 수술을 받은지 1년이 채 안 되었을 무렵, 그는 배가 많이 아팠다.장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장염이 자주 반복되었고, 그러려니 했다.심상치 않게 자꾸 아파서 의사에게 여러번 말했는데, 괜찮다고 했다.CT를 찍었는데 장이 전체적으로 부어있는 상태, 장염 이라고 했다.그는 그 이후로 6개월간 배가 계속 아팠다 말았다 했다. 더 이상 의사에게 말하는 것이 계면쩍어 그는 한의원에도 가 보고 온열치료도 해보고 금식도 해 보고, 자기 나름으로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배가 점점 불러오기 시작했다. 배는 나오는데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원래 주치의에게 돌아와서 다시 검사를 받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재발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는 너무도 단호하게 재발이..

비법 아이템

레지던트일 때는교수님과 회진을 도는데 환자들이 어디어디 불편하다, 아프다는 말을 할까봐 내심 불안했다.환자가 뭔가 새로운 증상을 호소하면 교수님들이 물으신다. 이 증상은 왜 그런거죠?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이런 질문이 들어올 때 막힘없이 대답하는 전공의가 엑설런트하게 평가받는 건데... 나는 전혀 모르고 있던 증상을 불쑥 말해버림으로써 나를 물먹이는 환자들이 꽤 있었다.'뭐야, 나한테는 한마디도 안하더니 왜 교수님한테 직접 말하는거야? 내가 그렇게 잘 해줬는데' 속으로 환자 욕을 하면서도, 교수님 앞에서는 머리를 긁적이며 저는 첨 들은 증상이라고, 원인을 찾아보겠다고 말씀드리고 그 위기를 넘길 수 있다. 그러면 액설런트하지는 않아도 거짓말은 안하는 전공의라고는 평가받을 수 있다. 괜히 어설프게 원인..

경희, 도담이 엄마가 되다

2013년 5월 22일 밤 11시 40분. 경희가 도담이 엄마가 되었다. 도담이가 뱃속에 있을 때 경희는 입덧도 안하고 감기도 안 걸리고 별로 붓지도 않고 큰 탈없이 잘 지냈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를 했다. 초산인데 10시간 진통을 했지만 정작 배가 아프다 싶었던 건 2시간 정도. 그 와중에도 경희는 카톡으로 문자하고, 페이스북에 들락달락 거리고, 크게 힘들지 않았나 보다. 예정일에 딱 맞춰 세상에 나온 도담이, 엄마를 성가시게 안하는 착한 아들이다. 오늘 퇴원하는 경희. 뭐 먹고 싶냐고 문자를 보냈더니 아무거나 다 먹고 싶다며 거절을 안한다. 주섬주섬 빵을 한 바구니 사가지고 병실에 가 봤더니 산모가 붓지도 않고 아주 쌩쌩하다. 애기 황달검사를 했는데 퇴원해도 된다고 했다며 퇴원 준비 한창이다. 옆에 ..

앞으로 안하기로 한것들

다른 사람이 내 마음 알 수 없고나도 다른 사람들 마음 모른 채 산다. 원래 그런거지. 내심 잘 해보려고 했는데,환자를 잘 살피는 마음으로 노력한건데환자에게 원망듣고그 일을 하느라 여러 간호사들 과외 업무로 힘들게 하면서 일을 해 왔지만 결과가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여러 사람 힘들게 만들었다.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 개인이 노력해서 할 수 있는 만큼 할려고 했다.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구조적 모순을 파악하고 제도적 개선, 개혁을 시도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험난한 길이니, 나는 소심하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노력해서 일을 할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일이 하나 제대로 되려면 그만큼의 에너지가 들어가야 되는 법이다.내가 다 못하는 일을 간호사들에게 ..

치과 엑스레이에서 환자들의 삶을 유추해본다.

치과 통합진료과 박원서 선생님과 함께 시작한 핑크 브로셔 프로젝트. 전이가 되어도 생존기간이 긴 유방암 환자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이다. 우리 유방암 환자들이 치과를 갈 때는 우리가 만든 핑크 브로셔에 환자 정보와 의뢰 사유를 기록하여 환자가 치과에 들고가서 접수처에 제시한다. 그 종이를 가지고 온 환자는 critical pathway로 관리되고 검사, 진료를 받게 된다. (한 마디로 이 종이를 가지고 가면 VIP가 되는 것이다!) 이런 Critical pathway를 개발하게 된 이유는 1. 전이성 유방암 환자의 치료 과정 중에 치아/치주 문제가 발생하는 비율이 생각보다 높아 정작 유방암 치료과정을 방해하고 치료가 제대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구강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

어떻게 말해야 할까

치료의 대안이 없어서아무 치료 안하고 지낸지 6개월환자는 복수로 배가 불러 2-3주에 한번씩 복수를 빼러 혹은 진통제를 타러 오신다.아이가 너무 어려서 어떻게든 치료를 해보려고 애쓰셨지만항암제 반응이 좋지 않은 난소암이다.앞으로 예후는 좋지 않을 거라고 말씀드렸다.얼마나 살거 같아요 물으셔서 솔직하게 1년 어려우실 거 같아요 그랬다.그랬더니 기대여명이 1년 미만이라고 진단서를 써달라고 하신다.그렇게 진단서를 써주면 보험금이 나온다는 것이다.오랜 투병기간, 살림살이 어려워진건 안봐도 뻔하다.그런 말을 당신 입으로 직접 말한다는 건 참 자존심도 상하고 속상할 노릇이다. 사실 속상하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목숨을 앞에 두고 속상한게 문제이겠는가. 가능하면 환자 편에서 진단서를 써 드리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민망한 마음을 통해 배우는 것

블로그에 글이 뜸했습니다.사실 지난 1주일간 들어와 보지도 못했습니다.무슨 일이 있어도 블로그에 들어와서 환자 질문에 답변하고환자 보며 살아가는 매일의 제 일상과 결심, 반성 등을 기록하는 것이 제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도 말입니다. 겉으로 보면 늘 비슷한 일상인데도 새삼 무기력에 빠질 때가 있고내가 하는 많은 노력들이 부질없이 느껴질 때도 있고너무 많은 실수를 하는 것 같아 나를 돌아보는 행위 자체도 외면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요즘이 그런가 봅니다. 사실 저에게 있어 슬럼프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시 환자들을 만나는 일입니다.환자를 보면서 슬럼프에 빠지기도 하지만 다시 환자들의 이야기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메말라버린 내 마음에도 뭔가가 다시 차오르는 느낌을 받으며 슬럼..

스승의 날은 솔직히 괴로워

저에게는 마음의 스승이 있습니다.그분께 연락도 못 드리고 하루가 갔습니다. 외래를 보는데 오늘 퇴원하는 환자가 불쑥 진료실에 들어와 꽃을 두고 갑니다.다른 환자 보호자와 얘기 중이라 미쳐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요거트를 세병씩 챙겨주시는 분이 있습니다.올 봄에 뜯은 쑥으로 떡을 만들어다 주십니다. 환자들의 정성어린 마음은 늘 감동입니다. 그들의 몸이 얼마나 불편한지는 제가 가장 잘 알지도 모릅니다. 그들 CT를 통해 몸을 가장 열심히 들여다보는 사람이니까요.그렇지만 전 별로 내색도 안합니다. 바깥에서는 전공의들과 학생들이 자기들 일하느라 바쁜 와중에 저를 만나려고 서성거리며 기다립니다.나는 아직 그들에게 스승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 어려운 사람인데그저 고마움으로 인사하려고 하는 그들..

희승이 치킨 먹다 배터지겠네요

지난 월화 사이에 더 후원해 주신 분들의 현황입니다. 총 1,275,000 원입니다.우리 환자들 이름학교/병원 선배님들 이름이 보입니다. 주치의인 소아과 한정우 선생님은 희승이 방사선 치료를 위해 서창옥 선생님과 논의하고 계십니다. 척수로 전이가 진행되고 있는데 뇌를 포함할지 말지 그런 걸 결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잘은 몰라도 아주 어려운 상황인것 같습니다. 의사도 자기 분야 아니면 잘 모릅니다. 그냥 보호자같은 마음으로 물어봅니다. '그래서 치료가 된다는 거에요 안된다는 거에요?' 희승이는 지금 항암치료 중인데, 경과가 하도 험해 보여 걱정이 되었어요. 한정우 선생님께 '괜찮겠어요?' 그렇게 물었더니 "왜요? 가능성 없다고 보세요? 전 있다고 보는데..." 고개를 갸우뚱하며 눈을 크게 뜨고 나를 ..

아플 시간도 없이

첨부터 유방암 4기.HER2 양성.폐전이.당시 최초 HER2 표적치료제인 허셉틴이 우리나라 전이성 유방암에서 보험허가를 받은지 얼마 안된 때. 그녀는 운이 좋게 표적치료제를 포함한 항암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1년 반 정도 약효가 유지되다가 폐전이가 다시 악화되었다.알려진 평균 기간보다 약간 오래 약효가 유지된 것 같다. 당시에는 (2009년) 2차 치료로 capecitabine 과 lapatinib 이 우리나라에서 보험으로 인정되지 않은 때였다. 마침 HER2를 타겟으로 한 신약 임상연구가 우리병원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은 'Emilia (에밀리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연구는 T-DM-1 이라는 신약이 기존 표준요법으로 인정된 capecitabine과 lapatinib 이라는 약에 비해 어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