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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갈 길이 멀다

우리 병원은 오래된 병원이다.좋게 보면 역사가 있는 병원.나쁘게 보면 구식 병원. 암센터 원장님이신 노성훈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우리나라 어떤 기업도 30년 이상 명성을 유지하며 규모를 유지, 발전하기 어려웠다고.기를 쓰고 운영하는 기업도 흥망성쇠의 부침이 있기 마련이고 살아남기 어려운 법인데, 소위 '주인없는 병원'인 우리 병원이 이렇게 오랜 역사 동안 망하지 않고(!)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병원 발전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고 열심히 일하는 조직 구성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한편으로는 맞는 말씀이고 감동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그런걸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도 된다.(이 반골기질! 원장님 죄송합니다!)'나도 우리 기관을 위해 그런 사람..

희승이 치킨 많이 먹겠네요

호스피스 팀에서 아침에 메일을 보내 왔습니다. 금요일 오후에 블로그에 올린 제 글을 보고 금토일 사이에 후원금을 보내주신 분들의 현황입니다. 총 890,000 원 입니다.슬기가 5천원 준거 보태면 895,000 원이네요. 저한테 치료를 받았던 환자들 이름도 눈에 띕니다.다들 이제 병원이라면 등돌리고 잘 살고 계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들러서 정 주고 가시네요. 나랑은 안면도 없이 블로그로만 알고 지내는 분도 계십니다. 토요일 사랑의 리퀘스트에도 많은 분들이 사랑의 전화 한통 넣어 주셨을 거라고 믿습니다.(마침 저는 TV를 늦게 트는 바람에 못 봤어요. 앞부분에서 방송을 하고 지나간건지...) 암튼 모두들 정말, 감사합니다. 제 마음이 울컥 합니다. 우린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아도 되갚지 못하고 삽니다.아마..

라듸오를 들으며

난 TV를 보지 않는다.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도 안 좋아하고 여행 프로그램이나 야구랑 뉴스 그 정도 봤었는데 이제 그나마도 안본다.야구하는 시간에 집에 있어본 지도 오래 되었다. TV 앞에 앉아도 TV를 끄는 편이다. 재미없고 시끄러워서. 밤에 늦게 집에 갔는데 잠이 안 오면 살인이나 스릴러를 주제로 하는 미드만 본다. 잠을 잘려고 TV를 켠다. 볼륨은 0으로 하고 화면만 본다. TV 틀어놓고 자다가 맨날 엄마한테 혼난다.요즘은 그나마도 재미가 없다. 뭐든 재미가 없다. 대신 라디오를 듣는다.아침 출근할 때 라디오에서 하는 정시뉴스를 듣는다. 뉴스에서 새로운 소식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늘 비슷하다. 일기예보와 교통상황이 가장 유용한 정보. 출근하면서 아침 6시 15분에 시작하는 MBC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

어쩌면 인생은

어제는 우리 병원 진단검사의학과에서 일하는 동기를 만났습니다.토요일이지만 병원 내 각 검사실을 둘러보며 문제는 없는지 체크하는 일을 하는 당직이라고 하더군요.진단검사의학과 의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환자들은 알 수 없습니다. 임상의사인 저도 사실 잘 모릅니다. 그 친구는 아주 성격이 꼼꼼하고, 자기가 맡은 일을 목숨 걸고(!) 열심히, 충실히 하는 녀석입니다.자기가 검체를 다루는 그 모든 과정에서 한 치의 오차가 발생하지 않도록 섬세하게 신경쓰고 확인하며 일합니다. 그것이 환자를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라는 믿음이 확실한 사람입니다. 당장 눈 앞에서 환자를 보지 않아도 자기가 리포트하는 그 결과 하나하나가 환자에게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칠 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 흔한 혈액검사 한번도 그 ..

희승이 치킨값 좀 보태주세요

희승이는 Ewing's sarcoma 로 항암치료 중인 고2 남학생입니다. 작년 8월에 병을 진단받고 다른 병원에서 항암치료랑 방사선치료를 받았습니다. 이 병은 항암치료과정이 특이합니다. 엄청 오래 치료하고 스케줄도 복잡하고 약도 엄청 독합니다. 한번 치료를 시작하면 1년 이상은 계속 치료를 하는거 같아요. 저는 이 병을 치료해 본 경험이 없어서 치료 과정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뭏튼 엄청 힘든 병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희승이는 치료가 잘 안되고 있는것 같습니다. 척추로 척추로 병이 계속 진행되고 있어요.이전에 치료받았던 병원에서는 약제 반응이 좋지 않고 자꾸 전이가 되니까앞으로 예후가 안 좋고 더 이상 항암치료를 하는게 큰 의미가 없다고 했었나 봐요.어찌어찌 해서 지금은 우리병원 소아청소년과에 입원해..

지금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난 천주교 신자지만 믿음이 강한 편이 아니다. 사실은 거의 나이롱 신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순간,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순간을 만나면 묵주반지에 의지해서 주의 기도를 열번 한다. 그것이 그를 위해 하는 나의 최대한의 노력이다. 나를 믿고 치료받았던 환자가 이제 퇴원도 할 수 없는 나쁜 컨디션이 되어 끙끙 거리며 밤을 뜬 눈으로 보낼 때 나는 그냥 기도를 할 뿐이다. 나의 기도로 뭔가가 좋아질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난 왠만하면 입원을 잘 안 시키는 편이라, 입원해 있는 환자들은 여기 저기 신경써야 할 부분이 많은 환자들이다. 그리고 항암치료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항암치료는 걸어 다니는 사람이 외래에서 받는 경우가 많다. 입원을 하는 것 자체가 뭔가 컨디션이 안좋다는 것을..

호스피스 보험시대

내년부터 호스피스 행위에 수가가 붙어서 돈을 받을 수 있는 의료행위가 될 것 같다.수가가 잘 책정되서많은 병원이 적극적으로 호스피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아직까지 호스피스는 그 자체로는 수가가 매겨져 있지 않다. 환자를 위한 자원봉사 수준으로 제공되는 서비스이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는 전문적인 호스피스 프로그램이나 임종 관련 간호 등이 제대로 개발되지 않은 형편이다. 전문가도 많지 않다. 우리 병원의 경우호스피스 병동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각 과에서 호스피트 팀으로 협진을 의뢰하면 호스피스 전담 간호사가 환자를 방문하여 상황을 파악한다. (이 대목에서 호스피스 전담 의사가 있으면 좋지만 아직은 아쉬운 실정이다. 나도 아주 부분적으로만 활동하고 있는 형편이다.)간호사는 여러 차례 ..

러시아 할머니 홈런치심

72세 러시아 할머니. 2년 전에 러시아에서 난소암 수술하고 항암 치료를 하셨다는데 - 무슨 약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러시아 글씨를 영어식으로 읽어보면 taxol 이랑 carbo 랑 하신거 같다 - 항암치료 끝난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재발하신 것 같다. 애초부터 3기였으니 2년 안에 재발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난소암은 최초 재발이 6개월 전이냐 후냐가 예후에 중요하기 때문에 금방 재발한 할머니 난소암은 별로 좋아보이지 않는다. 난소암에서는 플라티넘 약제가 가장 중요한데, 이에 대한 감수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6개월을 잡는다. 최초 약제로 치료하고 끝난지 6개월이 지나서 재발을 하면 비교적 감수성이 남아있는 걸로 생각하고 같은 약을 다시 써도 다시 좋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개념이다.플라티넘 저항..

생명력이란 무엇인가

방명록에 남긴 환자 어머니의 편지입니다. 그리고 환자였던 따님이 마지막에 남긴 편지를 같이 남겨주셨습니다. 존경하는 이수현 선생님: 제 딸 영민이는 전적으로 선생님의 전문가적 권위의 겉에 코팅된 측은지심에 자석처럼 끌리어 질병을 견디면서 승리하며 지냈음을 고백합니다. 그렇지요...!!! 환자가 어떻게 지내는가를 결정짓는것이 전적으로 주치의와 팀으로 움직이는 간호사들의 헌신적인 돌봄때문이었으며 그 어려운 길에 언제나 천사로서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일생동안 많은 순간 천사의 손길을 기다렸지만 종양내과에서 치료받으며 무수히 많은 천사들을 만나곤 했습니다. 딸 영민이는 전적으로 산생님을 신뢰하므로 충성으로 순응 했습니다. 진통제를 3단계로 처방받았으나 전혀 예상밖으로 가장 초기단계의 약으로 조절했지요! 처음부터..

역시 그녀는 강철 여인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강철여인이 있다. 그녀는 최초 유방암을 진단받고 치료했다가 7년만에 폐로 재발했는데 재발되어 치료한 지 6년째다. 그동안에는 폐에만 병이 있었는데 작년 말에 뇌로도 전이가 되었다. 자꾸 몸이 떨리는 증상이 있었는데 그게 뇌 병변에 의한 경기로 나타난 증상이었다는 사실을 MRI를 찍어보고서야 알았다. 한달 이상 증상이 있었는데 내가 그 증상이 경기인 줄 알아채지 못해서 검사를 좀 늦게 하게 되었다. 내가 사실 뇌신경학적 검사에 좀 약한 편이다. (한때 망치로 환자들 무릎, 팔꿈치 열심히 두들기고, 발바닥도 열심히 긁어보고, papiledema 를 본답시고 opthalmospope 도 살까 생각도 했었다. 어느새 그런 신체검사는 열심히 잘 안하는 사람이 되어 간다. 청진하고 장음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