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어쩌면 인생은

슬기엄마 2013. 5. 12. 12:17

어제는 우리 병원 진단검사의학과에서 일하는 동기를 만났습니다.

토요일이지만 병원 내 각 검사실을 둘러보며 문제는 없는지 체크하는 일을 하는 당직이라고 하더군요.

진단검사의학과 의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환자들은 알 수 없습니다. 

임상의사인 저도 사실 잘 모릅니다. 


그 친구는 아주 성격이 꼼꼼하고, 자기가 맡은 일을 목숨 걸고(!) 열심히, 충실히 하는 녀석입니다.

자기가 검체를 다루는 그 모든 과정에서 한 치의 오차가 발생하지 않도록 섬세하게 신경쓰고 확인하며 일합니다. 그것이 환자를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라는 믿음이 확실한 사람입니다. 당장 눈 앞에서 환자를 보지 않아도 자기가 리포트하는 그 결과 하나하나가 환자에게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칠 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 흔한 혈액검사 한번도 그 환자의 이전 검사 결과와 확인하여 이상한 값이 나오면 검사를 반복하고 임상에서 그 환자를 담당하는 의사와 전화하여 의문점을 제기하여 재검이 필요함을 설명하여 원인을 밝히려고 애씁니다. 임상의사인 저와는 같은 상황도 다르게 보는 시각을 가졌기 때문에 때론 아주 유용한 코멘트를 해 주기도 합니다. 

슬라이드 한장을 봐도 몇번을 재검하여 세포 수를 셉니다. 대충 세서 결과를 낸다 한들 우리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 친구는 빛이 나지 않는 일, 성과도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자기의 역할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그 친구가 낸 결과는 무조건 믿을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의사'이기 때문에 환자를 직접 보는 사람은 아니라 하더라도 환자와 연관된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것이 최소한의 양심이자 상식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과가 마찬가지지만, 월급받고 일해야 하는 만큼만 일하면서, 나머지 시간과 노력은 자기 연구, 자기 논문쓰는 것에 투자하는 사람이 실속있는 사람인데, 이것 저것 눈에 걸리는 것 많고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 논문으로 집중하지 못하고 일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역시 논문 압력을 많이 받고 있더군요. 


그의 설명에 의하면 

병원에 하나의 새로운 검사 항목을 새롭게 도입할 때도, 그 검사가 측정할 대상을 제대로 측정하고 있는지, 기존의 검사 항목에 비해 어떤 유용성을 갖는지, 가격 대비 효율 면에서 적절한지 등등 고려할 것이 매우 많다고 합니다. 

요즘 같이 의사들이 치열한 경쟁 구도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시대에 새로운 검사 항목을 하나 도입하면 논문 쓰기가 좋아집니다. 그러한 검사 항목이 연구자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연구물로 전락할 것인지, 진정 환자에게 도움이 될 것인지 비판적인 시각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는 그런 부분에서 아주  원칙적이고 바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우리 병원에서 일한다는게 참 자랑스럽습니다. 


너같이 꼼꼼하고 완벽한 스타일로 일하면 스트레스가 많을텐데 어떻게 견디니?

그런 성격머리로 일하면서 논문은 언제 쓰니? 


나도 처음엔 잠 안자고 공부하고 틈나는대로 논문쓰면서 진짜 최선을 다했어.

내 일이 아니어도 과를 위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고.  

아랫 사람들한테도 자기 몫을 위해서만 너무 요령피우지 말아야 한다고 훈계로 하고 그랬지.

그래도 되는 일 없더라고.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게 아니고, 

생각해보면 내 운명도 내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었던거 같아.

난 내가 진단검사의학과라는 걸 할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인턴을 하고 한 해 쉬게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어. 

결혼도 그렇고

아이를 낳는 것도 그렇고

평생 어떤 일을 하고 산다는 것도 그렇고 

운명이라는게 있는거 아닐까?


종교심이 강한 그는 그걸 하느님의 뜻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느님이 나의 쓰임새를 정하신 것이 있으니 

그 쓰임새에 맞게 그만큼 내가 일하게 되는 거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직 하느님에 대해 믿음이 약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하느님이 나에게 원하는 그 무엇이 있을거라 믿고 지금의 내 상태를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시원치 않습니다. 


다만 내가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노력한다고

내가 애쓴다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되는건 아니라는 점. 

결국 어떤 일이 성사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될 때, 

그것은 나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되는 건 아니라는 점에는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인생은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보다

우연적인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게 더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우연이 내 인생의 기회가 될지 아닐지 알 수 없지만 

내 앞을 스쳐가는 우연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부여잡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내 운명의 커튼이 열리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직 커튼이 걷히지 않았다고 아쉬워하기 보다는, 장막이 걷혔을 때 쏟아지는 빛이 부담스러워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당황해서 공연을 망치지 않으려면 눈을 감고도 공연을 할 수 있을 만큼 준비해 놓는게 필요하겠지요. 


인생이 

내 뜻만큼

내 의지만큼

내 노력만큼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니 

마음에 안 들어도 

잘 달래며 끌어안고 가야하는 것이 또한 인생인가 봅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