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스승의 날은 솔직히 괴로워

슬기엄마 2013. 5. 15. 23:54


저에게는 마음의 스승이 있습니다.

그분께 연락도 못 드리고 하루가 갔습니다.


외래를 보는데


오늘 퇴원하는 환자가 불쑥 진료실에 들어와 꽃을 두고 갑니다.

다른 환자 보호자와 얘기 중이라 미쳐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요거트를 세병씩 챙겨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올 봄에 뜯은 쑥으로 떡을 만들어다 주십니다. 

환자들의 정성어린 마음은 늘 감동입니다. 

그들의 몸이 얼마나 불편한지는 제가 가장 잘 알지도 모릅니다. 

그들 CT를 통해 몸을 가장 열심히 들여다보는 사람이니까요.

그렇지만 전 별로 내색도 안합니다. 


바깥에서는 전공의들과 학생들이 자기들 일하느라 바쁜 와중에 저를 만나려고 서성거리며 기다립니다.

나는 아직 그들에게 스승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 어려운 사람인데

그저 고마움으로 인사하려고 하는 그들의 마음을 차마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선배로만 인정해줘도 고마울 판인데 말입니다.

힐링페이퍼 학생들이 향초를 건네주고 갔습니다. 내가 서운하게 한게 많은데 이렇게 마음을 전해주니 더 미안합니다. 

심장내과 3년차로 너무너무 바쁜 김다래 선생이 들러 생크림 케익을 주고 갑니다. 연구간호사들과 토론하며 일하는 와중이라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습니다.

멘티 녀석들이 등산용 양말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게 뭔지 아는 놈들입니다. 

다들 콜 받고 병원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바쁜 와중에 외래 진료실에 겨우 들린게 분명합니다. 

오후 연속된 미팅으로 여기 저기 회의를 쫒아다니고 있는데 강버들 선생이 쫒아와 기도와 명상을 위한 음악 CD를 건네줍니다. 치프라 자기도 정신없고 내가 논문쓰라고 닥달하는것 때문에 마음 무거울텐데 꼬박꼬박 카드까지 써서 챙겨줍니다. 나에게 좋은 음악이 될 거라며 꼭 들으시라고 당부까지 해 줍니다.

명상 프로그램을 시작한 이충은 코디네이터가 차마 먹기에 고급스러운 파이를 두고 갔습니다. 많이 도와주지도 못하는데 미안할 뿐입니다. 


아침 회진을 도는데 카네이션을 내미는 전공의. 

차마 받기가 부끄럽습니다.

당당하게 카네이션을 달지 못하고 가운 주머니에 쑤셔 넣습니다. 

나는 아직 이런 걸 받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솔직히 괴롭습니다.


스승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가르쳐주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마음이 불편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선생으로서 아직 더 노력해야 하고 아직 멀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선생님들께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점심 때 내과 스승의 날 행사가 있었는데 지연된 외래 때문에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30분이 지났는데 지금이라도 갈까 하다가 그냥 돌아섭니다. 왠지 마음이 당당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스승의 날 마음이 불편합니다. 


저녁에 만난 다른 과 동기. 

그는 누군가가 자기를 교수님이라고 부르기만 해도 어색하다고 합니다.

우리 왜 이렇게 초라해 졌을까 씁쓸하게 웃습니다.

우리의 웃음은 겸손함이 아닙니다.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기 때문에 공유할 수 있는 쓴 웃음입니다.


스승이 된다는 것

선생으로 산다는 것

내 자신의 초라함을 알기 때문에 이런 지위가 부담스러운것 같습니다. 


지금 불편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그래도 아직 많이 뻔뻔하지는 않은 것 아니냐

스스로를 위로하며


자신은 없지만

좀 더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결심합니다.

늦었지만

나의 스승님들께 메일로나마 인사를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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