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민망한 마음을 통해 배우는 것

슬기엄마 2013. 5. 21. 23:13


블로그에 글이 뜸했습니다.

사실 지난 1주일간 들어와 보지도 못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블로그에 들어와서 환자 질문에 답변하고

환자 보며 살아가는 매일의 제 일상과 결심, 반성 등을 기록하는 것이 제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도 말입니다. 


겉으로 보면 늘 비슷한 일상인데도 

새삼 무기력에 빠질 때가 있고

내가 하는 많은 노력들이 부질없이 느껴질 때도 있고

너무 많은 실수를 하는 것 같아 나를 돌아보는 행위 자체도 외면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요즘이 그런가 봅니다.


사실 저에게 있어 슬럼프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시 환자들을 만나는 일입니다.

환자를 보면서 슬럼프에 빠지기도 하지만 

다시 환자들의 이야기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메말라버린 내 마음에도 뭔가가 다시 차오르는 느낌을 받으며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마 환자들이 저에게 에너지를 주기 때문이겠죠. 

그런 마음의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 

그것이 아마도 의사라는 직업의 가장 큰 매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말 안듣는 환자들 때문에 죽겠고

나를 속상하게 하는 환자들 때문에 짜증나고

치료해도 별로 좋아지지 않은 환자들 때문에 자책하고

그런 감정적인 다이나믹이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내가 아직 의사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삶을 감상적으로 살지 말고 현실을 받아들이며 냉정하면서도 치열하게 살아야겠다는 결심도 하게 됩니다.


환자 문제를 가지고 

여러 선생님들께 부탁도 드려보고, 

높은 선생님들한테 용감하게 문제제기도 해보면서, 

귀찮고 게을러진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그래서 환자는 영원한 의사의 스승인 것 같습니다.

책보다도 더 많은 것을 이야기 해주니까요.


실재 진료를 하면서 환자의 목소리에 귀를 잘 기울여야 하는데

그놈의 욱 하는 성질 때문에 저는 간혹 끝까지 환자 말을 듣지도 않고 화를 벌컥 내기도 하는데요

그런 날은 참 반성을 많이 합니다.

나를 그렇게 욱하게 만든 2명의 환자 CT를 보며 반성을 해야할 시간인것 같습니다. 


오늘은 외래에 신환이 많아 설명할 것도 많고 정기적인 CT 사진을 찍은 분도 많아 설명이 길어지다보니 외래가 엄청 지연되었습니다. 점심 시간도 없이 계속 진료를 봐야 했지요. 그 와중에 누군가가-그때는 누군지도 잘 몰랐습니다- 외래방에 들어와 나에게 뭔가를 전해주고 나갔습니다. 그냥 눈인사로 감사하다고만 했는데, 나중에 보니 편지가 들어있네요. 환자의 딸이 주고 간 편지입니다. 


환자의 딸이 의사였나 봅니다. 저는 몰랐네요. 

엄마를 치료하는 과정에 대한 고마움으로 머그컵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 엄마 환자 때문에 제가 속 많이 끓였습니다. 재발이 의심되는데 병원에 오시지를 않으셔서 제가 몇번 전화하고 결국 그 딸과 통화하여 강제로 병원에 오시게 했습니다. 

지금 제 마음 속 한 구석에 이 환자의 치료 과정에서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걸 다 환자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무엇이 석연치 않은 것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주 다학제 미팅 때 다른 선생님들과 케이스로 토론을 해볼 생각입니다만...


그 따님은 저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보내주셨는데

사실 저는 그 마음을 받기가 민망합니다.


아주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의사로 살면서 그렇게 민망한 순간들이 꽤 있습니다.

내가 해 드린 것도 없는데 고맙다고 하실 때

심지어 나의 실수도 있었지만 그걸 눈감아 주시고 오히려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실 때

고생은 환자가 다 하고 의사에게 고맙다고 하면 참 민망합니다. 


어쩌면 그런 부끄러움이 

나를 돌아보게 하고 겸손하게 만들고 정신차리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은 저에게 그런 환자들이 많은 날이었습니다. 


오늘 진료를 보고 나니 수첩에 많은 환자들 이름과 병원 넘버가 적혀 있네요.

오늘 내로 해결을 해야 합니다. 

그런 매일 매일의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저도 좀더 성장하고 좋은 의사가 되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선물로 주신 머그컵에 커피를 채우고

정신 좀 차리겠습니다. 

신윤진 선생님, 고맙습니다.

제 생각에는요, 잘 될 거 같아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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