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339

우리나라 좋은나라

'슬픔이 희망에게' 김혜정 2000년 캐나다로 이민간 작가 김혜정이 이민 10개월 만에 큰아들 설휘가 뇌종양을 진단받고 나서 치료받는 과정을 쓴 일종의 투병기이다. 책 제목도 진부하고 사실 투병기의 담론구조는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기 때문에 선뜻 읽고 싶은 생각이 드는 책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책은 투병기라고 보기엔 글쓴이가 다큐멘타리 작가라서 그랬을까? 엄마와 가족의 심정, 투병의 어려움, 극복을 위한 노력 등이 잘 묘사되어 있는 것 이외에도 우리나라와 캐나다 의료시스템의 차이, 장단점이 잘 분석되어 있는 보고서였다. 그녀는 한국의 의료시스템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환자를 위해 어떤 좋은 점이 있는지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유방암 수술 후 항암치료를 시작한지 9일만에 열이 나서 입원한 ..

블로그 관리

화려하고 보기좋은, 정보도 많은 블로그도 많고 세상에 글솜씨 좋은 사람들도 많은데 그럴싸한 재능도 없고 아이템도 없으며 성실하지도 않은 내가 어쩌자고 블로그를 시작했을까? 외래 개설 한달째. 아직 초반이라 환자가 별로 많지 않은데도 외래 시간이 지연된다. 아마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니 환자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니까 그런가 보다. 난 그래도 최소한 그만큼은 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마 환자가 점점 늘면... 손주혁 선생님이 여름에 연수를 가시면 더 많은 환자를 주어진 시간에 빨리 봐야 할 것이다. 어떤 외래 시간이든 환자들은 마음 속에 불만 가득, 고민 가득, 걱정 가득일 것이다. 그 마음 어디다 털어버릴 곳 없이 병원에 와서 주치의랍시고 날 만나 신체적인 증상 몇가지를 털어놓고 의례적인 대답 몇 마..

러시아 아줌마 진료

러시아 환자들을 가끔 진료한다. 외국 환자를 유치하는 것이 병원의 또다른 경쟁력 지표가 되고 있나 보다. 다른 분야의 진료나 수술 분야에서는 나름 수요와 공급의 곡선이 만나서 적절한 결과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러시아 환자를 항암치료 하는 것은 어떨까? 내 짧은 경험상 러시아에 사는 환자를 대상으로 한국에서 항암치료를 하는 과정에는 여러모로 난제가 많다. 러시아 환자들 중에 영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100% 통역이 따라붙어야 한다. 나는 환자를 보고 말하지만 환자는 통역관을 보고 말한다. 눈길을 마주치기가 힘들다. 통역이 없으면 아무것도 진행할 수가 없다. 나는 러시아에서 우리나라로 오는 환자들이 대부분 부자인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것 같..

그래도 참아야 하는가?

의사보다 환자가 욱 할때가 더 많다는 거 잘 안다. 환자는 의사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1:1 관계로 정정당당하게 맞대응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환자나 보호자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에 맞대응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환자는 나름대로 근거와 이유를 대서 나에게 문제제기를 하지만 -이성적일 때는 문제제기이고 이성을 잃을 때는 따지는 것이 되지만 - 의사인 나로서는 그의 문제제기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당장 그 앞에서는 그 질문에 의학적인 결함이나 논리적인 정합성을 설명해도 별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 이미 많이 분노하고 그걸 참다가 왔기 때문에 내 설명을 별로 들으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시간차를 두고 설명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되..

학생실습 시작

오늘 본과 3학년 학생이 실습을 나왔다. 그는 나의 첫 실습학생인 셈이다. 종양내과에는 2주에 한번씩 학생들이 실습을 나오고 작년까지도 실습강의, 회진 같이 돌기 그런 걸 했었기 때문에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닌데 오늘 내 앞으로 배당된 학생이 나오고 보니 새삼스럽다. 그리고 내가 학생 때 처음 만난 환자, 병원, 레지던트, 교수님들은 어땠는지 그 첫 느낌이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10년이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말았다. 얼마전 우연히 입수한 본과 1학년 시절의 사진들이다. 신경해부학 실습 시간 중 쉬는 시간인것 같은데 교과서를 보지 않고 족보를 외우고 있는 나의 모습을 동기 누군가가 찍었다가 엊그제 보내주었다. '누나, 학생들에게 족보 보지 말고 교과서 보라'고 말하나요? 라는 제목과 함께. 웃음이 터진다..

내가 만든 항암제 다이어리

오늘 퇴원하는 환자 2명에게 항암제 다이어리를 주었다. 사실 작년 후반기 몇개월에 걸쳐 수첩을 디자인하고, 수첩 문구를 작성하느라 술도 많이 마셨다. (맨정신에는 도저히 아이디어가 안나오므로.) 그래서 내심 꽤 만족스러운 럭셔리 다이어리가 나왔다. 그리고 퇴원을 앞둔 내 환자에게 수첩을 주게 되면 신날 줄 알았다. '환자와 커뮤니케이션 잘 하려고 이렇게 노력하는 의사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자랑하고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36세 밖에 안된 젊은 여자. 아이는 둘. 아직 둘째는 초등학교 입학도 안한 꼬맹이. HER2 양성답게 순식간에 양쪽 유방, 뼈, 간, 림프절 전이가 되었다며 병원에 왔다. 치료를 마치고 나가는 그녀에게 난 인턴 때 내가 잘 모르는 걸 환자가 물어보면 더듬더듬 설명하는 것 같은 ..

중립을 지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환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할 때 환자에게 나쁜 소식을 전할 때 나는 쿨하고도 중립적으로 그런 소식을 전하는 의사가 되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게 맞는 것이다. 감정을 잘 조절하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솔직히 잘 안된다. 걱정했던 검사가 잘 나오면 환자에게 빨리 그 소식을 전하고 싶어 안달이다. 걱정했던 검사결과가 좋지 않게 나오면 환자에게 가는 걸음이 너무 무겁고 마음이 울적하다. 그런 변화의 폭이 심한 사람은 종양학과 의사로 별로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나쁜 결과를 알려주고 있는데 내 설명을 듣는 환자의 얼굴이 쟂빛으로 변해가는 걸 보면 내 어조가 점점 변해간다. 환자는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 잘 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도 그 페이스에 말려서 ..

설명 하나는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내심 나는 환자들에게 설명하나는 잘 한다고 생각해왔다. (거만하게도...) 물론 환자 설명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것도 있지만 비교적 환자들의 심리상태나 지금 마음의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 궁금해 하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진료 초반에 환자와 충분히 이런 저럭 얘기를 나누는 것이 장기적으로 Rapport를 쌓는데도 도움이 되고, 치료 과정 중 예기치못한 문제가 생겼을 때 상의하기도 좋다. 그래서 나는 첫 외래, 첫 진단, 약물치료변경 등 처음 환자가 변화된 상황을 맞이한 상황에서 만나게 되면 초반에 시간을 많이 쓰는 것이 당장은 바쁘고 힘들지만 장기적으로 더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 내가 엊그제 연타석 퇴자를 맞았다. 수술 후 항암치료를 받으러 온 환자에게 재발의 고위험군을 대상으로..

내 이름으로 개설된 외래를 시작하며

3월 2일부터 내 이름으로 외래를 개설하게 되었다. 아직 입원환자는 2명, 외래 환자도 별로 많지 않다. 외래 환자들도 상황을 보아하니 자기 다음번에 기다리는 환자가 별로 없는 것 같으니 이것저것 사소한 것도 많이 물어본다. 나도 마음의 여유가 있으니 안정적으로 치료가 유지되고 있는 환자들에게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냐'는 여유로운 질문을 할 정도이다. 은근히 환자들의 직업이 다양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치료를 잘 해서 안정적으로 오래 잘 사시게 해드리고 이들로부터 '재능기부'를 받아서 다른 환자들에 도움이 되는 일을 부탁하면 어떨까 하는 호사스런 생각도 해본다. 오전 오후 외래가 100명을 육박하는 교수님 외래에서는 CT를 찍고 온 환자가 결과를 들으러 왔을 때 병이 나빠졌다는 말을 주치의가 하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