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죽음을 준비하는 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거짓말

슬기엄마 2012. 4. 3. 20:36

 

가끔

거짓말을 하게 된다.

 

지병으로 간경변이 심했던 60세 난소암 환자.

난소암 때문에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6차례 하였다. 간경변 때문에 백혈구 수치가 남들보다 많이 떨어지고 또 회복이 느렸던 탓에 항암치료 기간이 길어지고 환자도 많이 힘들었다. 그렇게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복수가 생겼다.

간 때문인지, 난소암 재발 때문인지 확인하기 위해 CT를 찍었다. 보이는 병변은 없지만 복수가 아주 많다. 복수를 빼서 검사를 했다. 물에서 암세포가 관찰되었다. 난소암 재발로 진단.

난소암은 platinum을 기본으로 치료하게 된다. platinum에 반응이 좋은 타입인지, 아닌지가 예후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이 환자는 마지막 platinum을 쓰고 6개월 내에 재발했기 때문에 platinum에 반응하지 않은 불량한 예후인자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항암제를 선택해서 치료를 시작해야 하지만 간이 걱정이다. 항암제를 자꾸 쓰면 간경변이 더 심해질 것이다. 다행히 독성이 심하지 않은 약제로 진행하는 임상연구가 있어서 재도전 하기로 했다. 환자에게 이러한 정황을 다 설명하지는 않았다. 복수로 힘들어 하는 환자에게 자세한 설명을 하고 싶지 않았다. 설명을 할 수록 비관적인 얘기를 하게 될 것 같았다. 환자와 보호자가 꼭 붙어있는 바람에 보호자에게 따로 설명할 시간을 마련하지 못햇다. 당장 급한 것이 아니라 차일피일 미루던 중, 어제 항암치료를 하고 오늘 퇴원하기로 했다. 아침 회진에 큰 아들이 회사 출근도 못하고 날 기다리고 있다. 내가 어머니를 만나기 전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단다.

 

어제 진단서를 받아보신 어머니가 진단명에 난소암 4기로 표시가 되어 있어서 갑자기 식음을 전폐하고 치료 의지를 잃으셨어요. 어떻게 하죠? 어머니께 말씀 좀 잘 해주실 수 있겠어요?

 

재발하면 4기라고 하는 건데...

 

그래도 어머니가 갑자기 너무 변한거 같아요.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에요. 지금 치료를 포기할 순 없잖아요.

 

...

알겠어요. 어머님께는 우회적으로 말씀을 돌려서 해볼께요. 그렇지만 가족은 아셔야 해요. 너무 일찍 재발해서 사실 평균적으로 보면 앞으로 하는 항암치료에도 반응을 하지 않고 나빠질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복수를 잘 말리는 것이 제 목표에요. 그래야 어디도 좀 다니시고 식사도 하시고 그럴 수 있으니까요.

물론 통계적인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이번 항암치료에 잘 반응할 수도 있어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컨디션이 좋을 때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예후는 지켜봐야 할 문제에요. 통계적으로는 예후가 좋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니 가족들은 그 점을 알고 계셨으면 합니다.

 

...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환자를 만난다.

 

어제 항암치료 잘 받으셨어요?

 

네...

 

특별히 부작용이나 힘든 점은 없으셨나요?

 

네...

 

다행이네요. 앞으로 잘 치료합시다. 복수가 빨리 말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제는 입원하지 않고 외래에서 치료하겠습니다.

 

...

 

왜 기분이 않좋으세요?

 

(울먹울먹) 제가 4기인가요? 전 3기말로 알고 있었는데요...

 

순간 나는 침을 꿀꺽 삼킨다. 어떻게 말하지?

 

난소암은 원래 복수로 진단되는 경우가 많아요. 다른 암은 복수가 있고 거기에서 암세포가 발견되면 4기라고 합니다만 난소암은 3기말이라고 하죠. 병기구분이 다른 암이랑 좀 다릅니다.

 

(그러나 재발하면 어쨋든 4기라고 봐야 합니다.) 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죠? 진단서가 잘못 되었나 봐요. 선생님, 저 열심히 치료 받을께요.

 

의사의 한 마디에 환자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내 손을 덥석 잡으며 고맙다고 하신다. 그런 환자를 보며 내 마음 속에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환자에게 거짓말하면 안되는데, 난 오늘 거짓말을 한걸까? 아닐 수도 있는 걸까? 의사가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나중에 환자가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는데 그냥 순간 좋자고 한마디 내뱉어 버린 것일까?

환자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의학적인 설명도 가능하면 다 해주고 싶다. 말많은 미국환자 아니어도, 보험료 많이 안 내도, 환자는 환자니까 그의 권리를 다 인정하고 의사로서 해 줄 수 있는 걸 다 해주는게 책무라고 생각한다. 예상되는 예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윤곽을 알려주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가슴에 못 박는 얘기를 단숨에 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

그렇지만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것.

줄타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