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펠로우일기

의사들의 정신불건강

슬기엄마 2011. 2. 27. 11:24

의사들의 정신건강

 

난 보통 기분이 나쁘거나 우울해지만 좋아하는 음악을 이어폰을 끼고 소리를 키워 무한반복해서 듣거나, 인터넷으로 책을 왕창 사서 읽거나, 시간이 되면 나를 아주 잘 이해해주는 지인들을 만나 수다를 떠는 등의 탈출구를 찾아 내 안의 스트레스를 풀면서 새로운 삶의 활력을 찾는다. 스트레스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문제가 좀 심각할 때는 밤늦도록 술을 마시거나 째즈음악을 연주하는 카페에 가서 멍하니 계속 음악만 듣고 앉아있는 등 현실을 좀 잊어보려고 외면하기도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해결의 주체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아마도 95%이상의 사람들도 이런 방식으로 일상의 어려움에 부딪혔다가 해결하기를 반복하며 우리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 안의 에너지, 의욕이 많이 소모되어 스스로 해결의 의욕을 갖기가 어려워질 때이다. 같은 상황도 내 마음이 무거우면 비관적으로 보이며 해결의 고리를 못찾고 앞날이 막막하다. 에너지가 좀 남아있으면 내 힘으로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고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니 신경쓰지 말자는 식으로 낙관적으로 상황을 버틸 수 있다.

지금이야 음악도 듣고 책도 읽을 수 있는 시간과 자율권이 생겨서 정말 좋은데, 전공의 주치의 시절에는 나에게 아무런 권한도 없고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시간도 없었다. 정말 어떤 순간에는 폭발해 버리고 말것 같다는 심정이 하루에도 몇번이나 찾아왔지만 그런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 없이 병동에서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 눈물을 글썽거리며 오더를 내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럴 때 윗년차가 지나가다 한마디만 해도, 환자가 뭐 한가지만 물어봐도 금방 나의 분노가 표출될 것 같아서 숨죽이며 나를 달래야 했었다.

사람 꼴이 보기 싫은데 24시간 사람과 함께 일하는게 내과 전공의다 보니 혼자만의 시간을 갖지 못한 채 다른과 의사, 윗년차와 아랫년차, 교수님, 간호사들 사이에서 이를 악물고 일해야했다. 조금이라도 내 맘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금방 분노가 폭발할 것 같은 활화산상태였다.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싯구절이 절로 읊조려졌다.

 

윗년차 눈치만 보면 될때가 좋았지

 

3월의 대학병원은 객관적으로 긴장과 혼란의 도가니이다. 특히 인턴, 레지던트를 비롯한 젊은 주니어 의사들은 모두들 바뀐 업무체계에 적응하느라 익숙하지 않은 일들에 실수투성이요, 모두들 긴장과 갈등이 최고조 상태다. 병원간 인력 이동도 많은 시기라 신임자나 군대에서 제대하고 복귀한 사람들은 새 병원의 처방과 진료 시스템, 관행에 익숙하지 않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얼마전 신규 간호사들과 함께 심폐소생술 한번 해봤는데, 환자를 회복시킨게 기적이다 싶게 모두들 당황하여 어쩔줄 몰라하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익숙한 사람이 아직 낯선 사람들의 몫까지 챙겨서 환자 진료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해야하는 일이겠지. 그런 와중에 과부하가 걸린 기존 멤버들이 텃세라도 부릴라 치면 신임자들은 아주 정이 뚝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런 의사들의 분위기는 환자들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에 환자들도 덩달아 예민해진다. 이렇게 근무 텀이 바뀔 때 카운터로 일하는 레지던트가 누군지, 내 윗년차가 누군지가 힘든 기간 동안의 삶의 질을 결정하고 인격악화를 예방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이제 조금 시간이 흐르고 보니 내 위에만 사람이 있는게 아니라 아래에도 사람이 생기고 그들과 조화롭게 맞춰가며 일하는 것도 큰 일이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된다. 윗사람 눈치 보는 거 못지 않게 아랫 사람 눈치를 보는 일도 있구나 싶고, 맘에 안 들어도 함부로 내칠 수는 없는게 직장이니까. 그래서 무릇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이해도가 꽤 높아야 한다. 내 스타일이든 아니든, 참고 견디고 맞추고 적응하며 함께 환자를 진료하는 동료가 되어가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는게 생각보다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되는 3월이다.

이렇게 우아하고 착하게 결심하지만, 사실 나도 바쁘고 예민해져있고 힘들고 짜증나면 본색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어쩌겠는가. 그릇이 그것밖에 안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러고 보니 의사들은 병원 내부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원치 않은 만남을 갖거나 말을 해야 하는 직업인 것 같다. 진료를 하는 이상, 의사들은 자기 혼자 힘만으로는 어렵다. 좋건 싫건 반드시 누군가와 협동하고 대화하며 의견을 교환하는 가운데 일하게 된다. 3월이 나에 주는 상황적 압력이 만만치 않다. 입 다물고 아무말 없이 지낼 수만 있어도 좋으련만

 

적절한 휴식과 자기만의 탈출구

 

정신적인 긴장과 무기력, 지치는 일상에서 자기 에너지를 제때에 충분히 채워놓지 못하면 병원이라는 직장은 일반 직장보다 훨씬 더 견디기 힘든 곳이다. 의사로 일을 하는 것은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진료 행위 자체가 매우 위험한 행위로 변질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피로와 긴장도를 확인하고 필요한 적극적인 지지가 필요하다.

미국의 어느 병원에서는 주위의 어떤 의사가 정신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정서적으로 불안해 보이면 익명으로 담당위원회에 제보를 하는 시스템이 있어서 정신과 의사를 비롯해서 심리학자, 사회복지사, 종교적 지지자 등이 그를 면담하고 필요한 경우 유급으로 4주에서 6주간을 쉴 수 있게 지원해주는 시스템이 있다. 비단 어떤 질병이 있다 없다를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굴곡 와중에 개인이 겪에 되는 어려움과 그 원인이 병원에 있던 개인 신상에 해당하는 것에 있던 간에 그에게 휴식을 주는 것이 필요하며 그 기간동안 문제를 해결하라고 할 수도 있고 필요하면 치료를 받을 수도 있게 제도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방식이 개인에게 또 다른 형태의 낙인(stigma)이 될 수도 있다. 직장 내 낙인이나 불명예, 수치심, 비밀의 폭로 등의 개인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내용이 어떻게 보호될 수 있을 것인지 방법이 있어야 겠지만, 여하간 최소한 시스템이 개인의 취약한 지점에 대한 보루가 되어주려고 하는 정책을 개발하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반면 이러한 시스템은 역으로 정말 extraordinary 한 개인을 걸러내는 시스템이 될 수도 있다. 악의가 있으면서 능력은 없어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인간, 악의가 있으면서 능력이 좋아 권력의 중심부로 이동해 더 많은 사람들과 조직을 말아먹는 인간, 악의는 없는데 능력도 없어서 사람 참 답답하게 하고 속 터지게 하는 인간. (악의는 없이 능력이 탁월한 인간형은 매우 드물어 만나기 힘든 귀한 인간형이다) 그런데 능력이 있고 없는 것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bizzare한 인간들이 있어, 진위를 떠나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모르게 만드는 인간들도 꽤 많다. 시스템에서 최소한의 체를 이용해 정말 문제가 되는 인간형은 좀 걸러줄 수는 없을까? 의사들은 일반 인구집단에 비해 정신질환의 발병율이 높고 알코올중독으로 진행하는 비율이 높다. 경력에 흠이 될까봐 정식으로 의료기관을 이용하지 않는 편이라 통계는 실재를 잘 반영하지 못한다. 언제부터인가 자살하는 의사들 얘기가 간간히 들려온다. 자살을 결심하기까지 정신세계도 피폐해졌겠지만 그만큼 자신의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함께 논할 친구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 고인의 외로움이 고통으로 나가온다. 반면 DSM-lV를 이용하여 딱 부러지게 정신과 질환으로 진단내릴 수는 없지만 분명히 뭔가 psychiatric pathology가 있는게 분명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 이들도 꽤 있다. 정신적, 정서적으로 어려워하며 힘들어하는 이들에게는 도움의 손길을, 병리적 이상 징후를 보이는 이들에게는 그에 걸맞는 치료를 제공함으로써 의사들의 정신건강이 보존되는 길을 마련해야 할 것 같다.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오늘 필요한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