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레지던트일기

마지막 일기

슬기엄마 2011. 3. 1. 18:29

마지막 일기

 

2004 4, ‘슬기엄마의 인턴일기가 시작된 이후주치의 일기로 이름을 바꾸면서 만 4년 가까이 연재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동안 제 글을 읽고 댓글을 통해, 또 직간접적으로 의견 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줌마 인턴으로 시작한 저는 내과 의국 내 최고령자로 3월이면 4년차 치프가 되고, 제가 병원 생활을 시작할 때 초등학교에 입학한 슬기는 어느덧 5학년이 되어 인터넷으로 MP3를 다운받아 듣는 것을 좋아하는 청소년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럴수록 내가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며 초조함과 부끄러움이 쌓여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하루가 되어야 한다는 계몽주의의 담론에 익숙해 있는 편인데, 근간에 이르러 주치의 일기를 계속 쓰는 것이 앞으로 더 나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반복되어 오늘 글을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이 코너를 마감할까 합니다.

글의 소재를 선택할 때마다 느끼는 갈등이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두 가지 측면에서 제 글의 한계가 있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의료제도나 의료계의 현실에 대한 거시적인 시각이 점차 소멸되어 간다는 느낌을 스스로 받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제가 공부했던 사회학은 작은 현실들을 엮어 규칙을 발견하고 거대 담론으로 일반화하는 학문이었는데, 환자 한 명, 장기 하나, 검사 하나하나가 중요하고 그걸 가지고 고민하며 해결해야 하는 풋내기 의사로 살다보니 내가 세상 흐름의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돌아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의료계 내부적인 논쟁이나 정치적 사안에 대해 잘 모르고 지냈고,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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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흥미있거나 궁금한 사안이 있거나, 논쟁거리가 생겨도 주위 의사들과 이에 대해 얘기할 만한 시간적 공간적 여유는 없었습니다. 때론 내 의견이 있다 해도 병원이라는 엄청난 위계 조직에서 레지던트의 위치는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기보다는 입다물고 조용히 환자만 보면서 지내는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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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차 초반에 한 회식자리에서 그런 문제를 얘기했다가 다음날 환자 진료에 문제가 생기자 전날 회식자리에서 제가 한 말을 끄집어내 빈정거렸던 윗사람이 있은 후로 저는 회식에서 제 개인적인 의견이나 주장을 말하지 않기로 결심하기까지 했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회 내에서 의료가 차지하는 다양한 속성, 전문가로서 의사의 사회적 책임, 의료를 둘러싼 여러 직종과 자본의 갈등 등 수많은 일들을 그냥 스쳐 보냈습니다. 지면을 통해 뭔가를 말하려면 그만큼 공부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도 없었고 판단을 내릴 만한 능력도 점차 소실되어 갔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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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내가 쓴 이 글을 내가 일하는 병원 내의 누군가가 읽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비판하고 싶은 사건들, 동료들의 문제, 병원 내에서 관찰되는 구조적·개인적 잘못들을 함부로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단지 흉허물을 덮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문제의 근원에 더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기 때문에, 단지 발설해 버림으로써 사건을 확산시키는 것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도 인정합니다.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 것 아니냐고 누군가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이 그 비판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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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로 제 글의 소재가 다소 중립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주제, 혹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농담거리 등을 맴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의대에 편입하게 되었을 때, 인턴 생활을 시작할 때, 내과 레지던트가 되었을 때, 그때마다 저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시선들이 있었습니다. ‘네가 의료사회학을 했다는데, 어디 한번 지켜보마. 제대로 전공을 살리는지’, ‘의사가 되기 전에는 한국의 의료제도와 의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었는데, 시각이 유지될지 혹은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지등등의 말이 지금도 들리는 듯합니다.
저는 아직 내과 수련 중이고 내과 레지던트 트레이닝과 사회학 박사학위 논문은 도저히 같이 진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요즘은 사회과학 서적이나 논문을 읽으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한참 걸리고, 사회학 내부적인 (소위) ‘유행은 전혀 따라잡지 못하고 있으며, 사회학과 내 연구자 공동체집단과는 멀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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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나면 갈팡질팡 할 때가 많습니다. 어떨 때는 사회과학 신간 서적을 읽거나 오래 전에 내가 공부하며 모아두었던 논문, 정리해 놓은 파일을 열어보지만, 이미 사고 체계가 많이 변해버려 나의 옛날 아이디어를 전승해서 풀어가려면 앞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지 답답할 따름입니다. 어떨 때는 외국 학회에 참석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임상데이터를 정리하는 엑셀파일을 채우며 의학논문을 준비해 보지만, 임상진료와 연구라는 어느 한 축에서도 전문가가 되지 못한 채 수많은 오류를 반복하며 시간을 날려버리기 일쑤입니다. 집에서는 아마 제가 무슨 대단한 위인이라도 되는 줄 알고 있을 겁니다. 어느 순간 마음이 조급해지고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면 집에 못 가고 병원에서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슬기와 슬기 아빠에게, 그리고 가사노동을 대신 짊어지고 하시는 친정 어머니께 죄송하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지난 번 글에서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로이제 100% 의사가 다 되었다는 평이 있었습니다. 아직 레지던트인 저로서는 100% 의사가 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 100%란 무조건 의사 편에 선다는 의미에서 100%가 아니고 다른 여타의 것을 떠나 환자 진료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점에서 100%가 요구되는 것이라고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저에게 baseline이 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 미처 완성하지 못한 사회학 공부를 하면서 저의 세부 전공을 살리는 것으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어떤 글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되어 여러분께 인사드리게 될지 모르겠지만, 저에 대한 평가를 조금만 더 유보하고 지켜봐 주십시오.

소중한 지면을 저에게 할애해주신 청년의사에도 감사드립니다. 휘발될 뻔한 저의 4년이 일기로 남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당분간 마음 속에, 머리 속에 뭔가 알찬 것을 저장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비워진 채로 살면서 조금씩 채우는 것은 제 몫이겠지요. 저와 함께 공부하던 많은 대학원 동료들이 번듯한 대학의 교수로 발령을 받아 연구활동을 왕성하게 하는 걸 보면 부럽습니다. 외국 유학까지 다녀와서 영어논문 업적도 많고 지적 유희를 즐기며 냉철한 사고방식을 발휘하는 것도 부럽습니다.
나는 나이만 먹고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싶은 조급함이 들 때면 본과 3학년때 마라톤에 도전하던 시절을 떠올립니다. 그 누구와 비교할 것 없이, 나에게 주어진 풀코스를 끝까지 다 뛰자는 생각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5시간의 42.195km. 그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볼까 합니다. 독자여러분, 그동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