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레지던트일기

내 안에 버려야 할 것들

슬기엄마 2011. 3. 1. 17:56

내 안에 버려야 할 것들

 

2년 전 내가 인턴을 처음 시작할 때, 평일 약제부에서 지정한 시간 이외 혹은 공휴일에 항암제 처방을 내면 인턴이 항암제를 조제했었다. 약제부도 아닌 암병동 한켠에 위치한 조제실에서는, 약제부가 지정한 시간 내에 chemo order를 못 낸 레지던트 때문에(!) 인턴들이 우글우글 모여 chemo mix를 하는 풍경이 자주 연출되곤 했다.

하지만 공휴일에 chemo start 하는 것이 레지던트의 책임이겠는가. 휴일을 앞두고 원무과에서 환자를 입원시킨 거고, routine schedule에 따라 투약하면 되는 chemo를 굳이 일요일이라고 delay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정규 mix 시간이 없는 일요일에도 chemo는 시작되어야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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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인턴들은 다른 일을 미루고 오전 내내 mix 실에 붙어서 심하게는 10개 이상의 항암제를 mix해야만 했다. 어떤 약을 NS로 미리 녹이는지, 어떤 solution을 섞어서 mix하는 것이 맞는지, 1 vial에서 얼마를 덜어서 maintain fluid에 섞는 것이 맞는지를 따지고 계산하느라 여러 명의 인턴들은 그 좁은 공간에서 머리를 맞대야 했다. 한번은 cisplatin 10병이 들어있는 box를 떨어뜨려 그 중의 몇 병이 깨지는 일도 있었고, 급한 마음으로 mix하느라 손이 찢어져 10바늘 이상 suture를 해야만 했던 동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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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시 약사가 해야 하는 일을 왜 인턴이, 그것도 정작 doctor job을 해야 하는 시간을 반납해 가면서까지 해야 하는가에 대해 심히 분노하였고, 항암제 mix라는 낯선 일을 하느라 primary call을 받는 내과 인턴이 환자도 못 보고 약 조제에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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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당시 우리 인턴 동기들은 교육수련부를 통해 약국에 약사를 더 고용하여 항암제 order를 낼 수 있는 시간을 늘이고 공휴일도 약제부에서 항암제를 조제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그 결과 제안한 대로 다 되지는 않았으나 항암제 조제 시간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또 인턴이 항암제 조제를 할 경우 약물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으니 order를 가능한 규정 시간 내에 내서 정식 조제실 mix가 이루어지도록 하고, 부득이하게 규정 시간 이외에 항암제 처방을 하게 될 경우 담당 레지던트가 직접 mix하도록 지침이 변경되었다. 그래서 규정 시간 이외 항암제 조제를 의사가 하는 경우 그것은 담당 primary 레지던트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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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왜 인턴이 해야 하나?

얼마 전 토요일 오후, 나는 2명의 환자 보호자들과의 면담에서 현재 암 병기상 수술은 어려우며 항암치료가 가능하다는 설명을 하였고, 이에 대해 가족과 환자는 꽤 오랜 시간 상의하더니 오후가 되어서야 항암치료를 받겠다고 결정하였다. 그래서 나는 토요일 오후에 항암제 처방을 내게 되었고, 결국 나는 퇴근을 미룬 채 항암제 조제를 위해 아주 오랜만에 항암제 조제실로 향했다. 여전히 좁디 좁은 조제실, hood에서 뿜어져 나오는 더운 공기, 그리고 엊그제 term change가 되어어리버리한표정으로 조제실 주위를 왔다 갔다 하는 인턴들이 있었다. 과연 저게 모두어쩔 수 없는’ order였을까 싶을 만큼 많은 항암제들이 쌓여 있었다. Maintain fluid와 내가 주입해야 하는 약물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은 아는지, 1 vial에 몇 ml가 들어 있는지, solution으로 녹이면 몇 ml가 되므로 몇 ml를 뽑아야 규정된 항암약물의 농도를 맞출 수 있는지에 대해 계산은 한 건지, 그들의 몸놀림은 불안해 보였다. 원래 인턴이 하지 않기로 되어 있는 업무인데 왜 이렇게 인턴들이 많이 모여 있는지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하였다.

조제실이 좁아서 내가 들어가 조제를 하는 동안 다른 사람은 들어오기 힘들 정도로 공간이 협소한데, 한 인턴 선생님이 들어와서 옆 자리에 앉아 주사기와 약병들을 만지작거린다. 그러더니선생님, 어떤 needle로 해야 하는 건가요? ○○cc를 맞춰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며 나에게 묻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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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안한 마음에이 약이 어떤 병에 들어가는 게 맞는 건가요? 어떤 환자용으로 mix하고 있는 거지요?”라며 그에게 질문한다. 갑자기 두 사람은 땀을 범벅으로 흘리며 그 좁고 더운 hood 아래서 mix 용량을 계산하고 약을 환자별로 다시 분류하였다. 익숙하지 않은 그의 손놀림이 불안해 나는 그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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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지금 인턴 선생님들이 이렇게 routine으로 규정 시간 외 항암제 조제를 하고 있는 걸 보면, 지금 1년차들은 자신들도 이렇게 일 했으니 인턴이 이 일을 하게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다. 결국 우리가 1년차가 되었을 때 인턴에게 일을 내린 셈이 되고 악습이 다시 반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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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1년차가 항암제 조제까지 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그래도 우리가 인턴 때는 규정이 바뀌면서 1년차 선생님들이 했던 일이다. 그것이 언제부터인가 다시 인턴의 일로 내려갔다는 사실에 대해 실망스럽고 부끄러웠다. 2년 전 여러 명분을 내세워 인턴이 항암제 조제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그 결과 정식 문서화는 아니더라도 규정이 바뀐 바 있었는데, 그것을 우리 스스로 암묵적으로 파괴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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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년 전 당시 동기 인턴들은 모두 분노했었다. 왜 우리가 그걸 해야 하냐고. 2년 후 확인된 현실은 다시 인턴의 항암제 조제가 관행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 현재 우리 동기들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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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가 된 올챙이

원칙적으로 되짚어야 하는 문제는 항암제 조제가 의사가 아닌 약사에 의해 시행되도록 약국 인력에 대한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리라.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내 폐부를 찌르는 것은, 이제 개구리가 되어 올챙이적 생각을 너무 안 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지금에 와서 그때의주장들을 되짚어 보면 결국 우리가 인턴으로서 그런 일을 하기 싫어서 떼를 쓴 것이었거나, 아니면 1년차, 혹은 2년차가 되었다고 인턴 시절에 겪었던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 겪었던 분노들을인턴 때는 원래 그런 거야라며 은근슬쩍 덮으며 넘어가 버리는 것, 둘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었나?

굳이 창조적이고 excellent하지 않더라도, 예전의 관행대로, 권위적 구조에서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문제를 제기하기보다는 당장 해야 할 일들이 펑크나지 않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솔직히 버거울 때가 많다. ‘이걸 꼭 이런 식으로 해야 하나’,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 ‘효율적인 업무 진행을 위해서는 role을 바꾸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을까?’ 등의 문제의식을 가끔 느끼지만, 그것을 건의하고 실행하기 위해 누군가와 논의하는 시간을 갖기는 힘들다. 또 누구에게 건의하고 어떻게 건의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모호하다. 그래서 이제까지는 되는 대로,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 왔던 일들이 많았고, (현실적으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나도 가끔은 누군가에게 일을 지시하는 입장으로 position이 바뀌고 있다. 그러나 정작 내 내부는 별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아랫사람 입장에서 보면 나도 별 다를 바 없는 윗년차에 불과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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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 환자가 되어가다

우리 안에 버려야 할 것들에 대해 너무 관대한 것은 아닐까? 지금 비록 관행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처음 규칙으로 자리를 잡았을 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변하면 관행은 깨지고 새로운 규칙이 적용되어야 하는데, 그런 사항들을 충분히 점검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가 ‘as usual’로 지나간다. 또 환자를 보면서 웬만큼 alert하지 않으면 원칙과 관행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기 힘든 게 솔직한 내 수준이다.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로 사는 사람, 고민은 하지만 대안이 없는 사람, 대안을 꿈꾸지만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 많은 사람들이오늘을 유지하면서 살고 있고내일을 위해 오늘 우리가 우리 내부에서 버려야 할 것들을 걸러내지 못하고 있다. 전공의 신분으로 바쁘고 정신 없이 사는 것은 영원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금은 의사로서 살아가는 자신의 attitude가 결정되는 시간으로써 더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내 안의 버려야 할 것들을 제때 버리지 못하고 이 시간을 보내버리면 훗날 쓸데없는 fat만이 온 몸에 더덕더덕 붙어있는 비만 환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외부를 향해 소리칠 부분이 있다면 내부를 자정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구태의연한 명제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나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