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993

작아지는 나

환자가 적어온 다이어리. 먹은 음식 종류와 양 운동량 몸 컨디션 아이들 학교에 학부모 총회 참석 친정 식구들과 외식 이런 사건들로 가득차 있는 그녀의 항암제 다이어리. 외래 중 나는 그녀에게 말을 시키고 눈으로는 다이어리를 잽싸게 훑어 본다. 그러다가 들어온 문구. "내가 자꾸 작아지는 것 같고, 사람들이 나에게 잘 해주는 것 같지만, 외롭고 고립되는 느낌이 든다" 난 몸 컨디션을 물어본다. 4기 유방암을 진단받은 36세 젊은 엄마. 우리 병원에 처음 올 무렵은 어딘가 모르게 몸이 힘들어서 잠도 잘 못자고 음식도 잘 못먹고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고 했다. 그럴 것이다. 병이 깊었다. 그녀의 증상은 병의 분포와 관련하여 다 설명될 수 있었다. 그런데 항암치료를 시작하니 생각보다 독성을 심하지 않고 컨디션은 ..

그래도 참아야 하는가?

의사보다 환자가 욱 할때가 더 많다는 거 잘 안다. 환자는 의사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1:1 관계로 정정당당하게 맞대응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환자나 보호자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에 맞대응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환자는 나름대로 근거와 이유를 대서 나에게 문제제기를 하지만 -이성적일 때는 문제제기이고 이성을 잃을 때는 따지는 것이 되지만 - 의사인 나로서는 그의 문제제기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당장 그 앞에서는 그 질문에 의학적인 결함이나 논리적인 정합성을 설명해도 별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 이미 많이 분노하고 그걸 참다가 왔기 때문에 내 설명을 별로 들으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시간차를 두고 설명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되..

학생실습 시작

오늘 본과 3학년 학생이 실습을 나왔다. 그는 나의 첫 실습학생인 셈이다. 종양내과에는 2주에 한번씩 학생들이 실습을 나오고 작년까지도 실습강의, 회진 같이 돌기 그런 걸 했었기 때문에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닌데 오늘 내 앞으로 배당된 학생이 나오고 보니 새삼스럽다. 그리고 내가 학생 때 처음 만난 환자, 병원, 레지던트, 교수님들은 어땠는지 그 첫 느낌이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10년이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말았다. 얼마전 우연히 입수한 본과 1학년 시절의 사진들이다. 신경해부학 실습 시간 중 쉬는 시간인것 같은데 교과서를 보지 않고 족보를 외우고 있는 나의 모습을 동기 누군가가 찍었다가 엊그제 보내주었다. '누나, 학생들에게 족보 보지 말고 교과서 보라'고 말하나요? 라는 제목과 함께. 웃음이 터진다..

비싼 유전자 검사는 꼭 해야 하나요?

유방암은 다른 암에 비해 비교적 생물학적 특징이 잘 알려져 있는 편에 속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치료를 시작하기에 앞서 암세포의 핵이나 표면에서 발현되는 호르몬 수용제, HER2 수용체를 구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유방 조직검사를 하면 그 조직에 대해 염색을 하여 수용체의 발현 여부를 확인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수용체는 호르몬 수용체 (ER, PR)와 HER2 수용체 입니다. 이렇게 세가지 수용체 이외에도 병의 특성을 설명해줄 수 있는 여러 수용체 검사가 있지만, 치료적 관점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이들 세가지 수용체 검사입니다. 호르몬 수용체는 크게 ER (에스트로젠 수용체), PR (프로제스테론 수용체) 두가지로 구분해서 검사하고 둘 중의 하나라도 양성 반응이 나오면 (즉 수용..

결혼을 앞둔 경희에게

아직도 가끔 눈빛이 흔들리는 그녀 내가 진료실에서 진료하는 환자들에게서도 자주 발견하는 눈빛이다. 모든 치료가 끝나고 6개월에 한번씩 검사만 하면서 경과관찰을 위해 병원에 오시는데, 그러니까 병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일상을 즐겁게 사시면 된다고 말하는데, 그런 말을 하는 순간, 그녀들의 눈빛은 순식간에 흔들린다. 가끔 배가 아파도 가끔 허리가 아파도 살이 조금만 빠져도 그들은 눈빛이 흔들린다. "괜찮죠?"라는 질문 한번에도 눈물을 뚝. 그런 불안함과 순간 밀려드는 공포. 그런 마음이 얼마나 존재를 불안정하게 만드는지 아마 나는 상상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경희는 그런 마음을 이겨내고 결혼을 하려고 한다. 치료를 마치고, 레지던트로 복귀했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우리 유방암 파트에 와서 일하며 그녀는..

선생님이 시키는대로 다 했는데 재발이라니...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다 치료했어요. 항암치료도 하고 방사선치료도 하고 호르몬제도 먹고 꼬박꼬박 검사도 다 했고... 6개월 검사하기 전까지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근데 왜 재발된건가요?" 많은 환자들이 재발되었다는 말에 가장 먼저 의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재발이란...." 다음의 그림을 보면서 얘기하는게 좋겠습니다. 제일 왼쪽의 그림에서 파란색이 원발 암입니다. 암이 발생할 때는 주위의 혈관을 끌어모읍니다. 종양조직이 성장하기위해서는 산소와 기타 영양분을 섭취해야 하기 때문에 혈관을 이용해 이를 섭취하게 되죠. 그렇게 종양이 혈관과 만나면 혈관안으로 종양세포가 침투해 들어갑니다. 파란세포가 암세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즉 수술을 해서 원발 종양을 제거해도 이미 그 전에 혈관안으로 들어가있는 암세포..

내가 만든 항암제 다이어리

오늘 퇴원하는 환자 2명에게 항암제 다이어리를 주었다. 사실 작년 후반기 몇개월에 걸쳐 수첩을 디자인하고, 수첩 문구를 작성하느라 술도 많이 마셨다. (맨정신에는 도저히 아이디어가 안나오므로.) 그래서 내심 꽤 만족스러운 럭셔리 다이어리가 나왔다. 그리고 퇴원을 앞둔 내 환자에게 수첩을 주게 되면 신날 줄 알았다. '환자와 커뮤니케이션 잘 하려고 이렇게 노력하는 의사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자랑하고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36세 밖에 안된 젊은 여자. 아이는 둘. 아직 둘째는 초등학교 입학도 안한 꼬맹이. HER2 양성답게 순식간에 양쪽 유방, 뼈, 간, 림프절 전이가 되었다며 병원에 왔다. 치료를 마치고 나가는 그녀에게 난 인턴 때 내가 잘 모르는 걸 환자가 물어보면 더듬더듬 설명하는 것 같은 ..

중립을 지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환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할 때 환자에게 나쁜 소식을 전할 때 나는 쿨하고도 중립적으로 그런 소식을 전하는 의사가 되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게 맞는 것이다. 감정을 잘 조절하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솔직히 잘 안된다. 걱정했던 검사가 잘 나오면 환자에게 빨리 그 소식을 전하고 싶어 안달이다. 걱정했던 검사결과가 좋지 않게 나오면 환자에게 가는 걸음이 너무 무겁고 마음이 울적하다. 그런 변화의 폭이 심한 사람은 종양학과 의사로 별로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나쁜 결과를 알려주고 있는데 내 설명을 듣는 환자의 얼굴이 쟂빛으로 변해가는 걸 보면 내 어조가 점점 변해간다. 환자는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 잘 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도 그 페이스에 말려서 ..

설명 하나는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내심 나는 환자들에게 설명하나는 잘 한다고 생각해왔다. (거만하게도...) 물론 환자 설명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것도 있지만 비교적 환자들의 심리상태나 지금 마음의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 궁금해 하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진료 초반에 환자와 충분히 이런 저럭 얘기를 나누는 것이 장기적으로 Rapport를 쌓는데도 도움이 되고, 치료 과정 중 예기치못한 문제가 생겼을 때 상의하기도 좋다. 그래서 나는 첫 외래, 첫 진단, 약물치료변경 등 처음 환자가 변화된 상황을 맞이한 상황에서 만나게 되면 초반에 시간을 많이 쓰는 것이 당장은 바쁘고 힘들지만 장기적으로 더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 내가 엊그제 연타석 퇴자를 맞았다. 수술 후 항암치료를 받으러 온 환자에게 재발의 고위험군을 대상으로..

경희 2. 진단 2. 유방암 진단 후 여러 검사를 받으며

진단 2. 양성이라고 생각해서 진단 겸 치료 목적으로 수술을 하기로 했다가 조직검사 결과가 악성으로 나오자, 정확한 진단을 위해 여러가지 검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5살 때 폐렴으로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 처음 하는 입원이었다. 의과대학 학생으로 하얀 가운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이 더 익숙했던 이 병원에서 환자가 되어 하얀 환자복을 입고 병실 침대에 앉아있자니 여긴 내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MRI, PET-CT, 초음파, MUGA 등의 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며 ‘그 조직 슬라이드가 다른 환자랑 바뀌건 아닐까? 잘못봤을지도 몰라, MRI찍으면 제대로 나올 테니까 그 때까지는 난 ‘R/O(rule out)’ breast cancer 인거야. 암이 아닐수도 있어.’라고 믿으며. 그렇게 며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