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993

3월에는 대학병원 가지 마라?

3월에는 대학병원 가지 마라? “내과 3년차 이수현입니다” 슬기는 초등학교 4학년, 고학년이 되었고, 나는 내과 3년차, 고년차가 되었다. 우리는 둘 다 뭔가 으쓱해진 기분으로 3월 1일을 맞이했다. 병원에서 전화를 받을 때 “내과 3년차 이수현입니다”라고 말하며 내심 뿌듯함을 느낀다. 왠지 높은 사람이 된 것 같고, 내가 말하는 것은 예전보다 더 중요한 것 같고, 뭐 그런 겉멋을 잠시나마 느끼는 것이 크게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이제 3년차가 되었으니 일 하느라 바쁜 1년차에게 핵심만을 가르쳐주고 1년차가 잘 모르는 노하우를 알려주며, 시간이 나면 커피 한잔 같이 하면서 의사로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를 논의할 수 있는 그런 관계로 잘 지내야지, 하는 마음으로 내가 처음으로 함께 호흡을 ..

나는 ‘우수’ 전공의가 되고 싶었다

나는 ‘우수’ 전공의가 되고 싶었다 나는 ‘우수’ 전공의가 되고 싶었다. 환자도 잘 보고, 동료 선후배와 관계도 좋고, 틈틈이 공부도 하고, 이를 바탕으로 논문도 쓸 줄 아는 excellent 한 바로 그런 전공의. 한때는 나도 ‘우수하다’는 형용사가 나의 존재를 규정하는 상황에 익숙했었다. 그러나 그 한때는 너무 오래 전의 일이 되어 버렸다. 고백하건대, 뒤늦게 의대에 들어오고 인턴과 레지던트를 거치는 동안, 나는 누군가로부터 칭찬받고 인정받고 격려받으며 일하는 상황이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우수하다’는 것은 지위와 입장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는 측면이 있다. 그리하여 보편적으로 혹은 탁월하게 '우수한' 존재가 아닌 이상 적절하게 인정받기 힘든 것이 전공의 신분인 것 같다.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우..

나는 이럴 때 울고 싶다

나는 이럴 때 울고 싶다 오후 5시 40분. 응급실, 내시경방 간호사, 직원들은 퇴근 준비를 마칠 시간인데, ‘목에 조개껍질이 걸렸어요’를 주소로 내원한 환자가 응급실 EMR 명단에 떴다. 방금 전에 찍은 neck lateral view에서 esophagus에 걸려있는 조개껍질, 2cm가 넘는다. 응급의학과에서 연락이 오기도 전에 나는 이미 환자를 보러 간다. 그건 내가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시간상 정규시간 전후로 내시경방 당직 chief도 바뀌고 notify하는 staff 선생님도 달라지고 여러 모로 당직 이후로 넘어가면 시간이 delay되기 쉬울 것 같아 나는 lab도 나오기 전에 환자를 보고 교수님께 연락을 드렸다. 사실 대학병원 응급실에서는 진정한 응급도 많지만, 수많은 과들을 적재적소에 연결하고 ..

“너 미쳤니? 왜 그랬니?”

“너 미쳤니? 왜 그랬니?” 해는 뉘엿뉘엿 서쪽으로 넘어가고 사방이 어둑어둑해지는데, 등에 들쳐 업은 애는 배고프다고 울며 보채고, 저녁 밥상을 차려야 하는데 불씨는 안 살아나고, 화장실도 못 가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전래동화 속 아낙의 모습이 떠오르는가. 카운터가 휴가를 가 버려 그가 했던 낯선 일까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여기저기서 울려대는 전화에 이리저리 몸은 바쁜데 효율은 없이 진땀 혹은 식은땀을 흘리며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나. 나는 카운터가 휴가를 떠난 동안 지옥의 한 주를 보냈다. 그리고 지금은 휴가 중이다. 물론 내 카운터가 지금 지옥의 한 주를 살고 있을 게다. 무식함과 피곤함의 불협화음 지옥의 주간은 그 전주부터 뭔가 좋지 않은 기운이 서린 데서 시작됐다. 연속 3일간 하루 2시간미만..

내 안에 버려야 할 것들

내 안에 버려야 할 것들 2년 전 내가 인턴을 처음 시작할 때, 평일 약제부에서 지정한 시간 이외 혹은 공휴일에 항암제 처방을 내면 인턴이 항암제를 조제했었다. 약제부도 아닌 암병동 한켠에 위치한 조제실에서는, 약제부가 지정한 시간 내에 chemo order를 못 낸 레지던트 때문에(!) 인턴들이 우글우글 모여 chemo mix를 하는 풍경이 자주 연출되곤 했다. 하지만 공휴일에 chemo start 하는 것이 레지던트의 책임이겠는가. 휴일을 앞두고 원무과에서 환자를 입원시킨 거고, routine schedule에 따라 투약하면 되는 chemo를 굳이 일요일이라고 delay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정규 mix 시간이 없는 일요일에도 chemo는 시작되어야 했을 뿐이다. 때문에 인턴들은 다른 일을 미루고 오..

슬기 엄마 파견 가다

슬기 엄마 파견 가다 나는 지금 지방병원으로 파견을 나왔다. 남편은 내게 ‘파견은 레지던트 생활의 꽃(!)’이라고 했다. 결혼 10년째, 집과 남편과 슬기를 남겨두고 혼자 지방에 내려와 있는 것에 대해 충분히 미안하지만, 가벼운 흥분감이 들 정도의 경쾌함도 부인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나를 경쾌하게 하는 것은 본원 생활의 빡빡함에서 해방되었다는 점이리라. 물론 교과서적으로 다짐한다. 이곳 응급실에서 일을 하지만 내가 보는 환자들에게 나는 그 순간 최선을 다하는 주치의가 되어야 한다. 대학병원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환자를 위한 진료 이외에도 신경 쓸 일이 아주 많다. 다소 순발력이 떨어지는 나에게 그런 일들은 약간 버겁다. 내과 내 각 파트별로 notify system이 달라서 환자를 보며 밤새고 고생한 ..

나쁜 소식을 전하는 법

나쁜 소식을 전하는 법 내가 컴퓨터로 글을 쓰고 있는 병동의 바로 옆 환자 휴게실에서는 방금 폐암을 진단 받은 환자의 부인이 애써 울음을 참고 있다. 나는 마치 진단명을 고지함으로써 내 할 일을 다한 것인 양 자리를 빠져나와 병동으로 몸을 피한다. 대학병원이다보니 모든 과에 기본적으로 암환자가 많다.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며칠 전에 시행한 조직검사 결과 악성 종양으로 판정되었습니다’ 혹은 ‘이번에 새로운 증상이 있어 시행한 추가 검사에서 **, **에 전이가 있는 것으로 판정되었습니다. 치료했으나 암이 진행된 것 같습니다’ 류의 나쁜 소식 (환자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 같은)을 하루에도 수없이 전하는 것이 주된 일과이다. 의과대학 혹은 의사가 되는 어떤 과정에서도 ‘환자에게 어떻게 나쁜 소식을 전할 ..

2년차, 집에 있다가 갑자기 불안해지다

2년차, 집에 있다가 갑자기 불안해지다 3월 1일, 나는 2년차가 되었다. ‘2년차가 되면 정말 좋다’는 말을 여기저기서 들어 왔지만, 정작 나는 뭐가 좋은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더욱이 과연 내가 2년차의 자격이 있기는 한 건지 자신감이 없는지라, 솔직히 변화를 느끼기 힘들다. 당직 일수가 좀 줄었고, 나에게 잔소리하는 사람이 줄었고, 여기 저기 감시의 시선을 덜 느끼게 된다는 점은 2년차가 되어 느끼게 되는 자유로움이지만, 그 외의 것들은 아직 크게 변한 것 같지 않다. 새로운 출발의 발목을 잡는 여러 요인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퇴원요약지와 미비기록 정리인 것 같다. 환자가 퇴원하는 당일 혹은 그 다음날에 퇴원요약지가 정리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오전 회진 후 퇴원 오더를 내고 오전 중에 환..

꿈에 나타난 vocal cord

꿈에 나타난 vocal cord 미국의 외과 전문의 아툴 가완디가 쓴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의 1장에는 저자가 학생 실습 때 Rt. subclavian vein catheter insertion 하는 장면을 처음 목격했을 때의 느낌이 서술되어 있다. 보이지도 않는 혈관을 찾아 catheter를 넣는데 어떻게 puncture가 되는 것이며, catheter 끝은 어떻게 Rt. atrium을 향하고 있는지, 혈관을 찢지 않고 어떻게 advance하는지가 신기할 따름이라는 실습학생의 그 놀라움. 내과 1년차가 되어 환자의 vital sign이 흔들릴 때 intubation을 하고 c-line을 넣는 일들이 순식간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위험해질 수 있는 환자들을 ‘내가 manage해야 한다’는 사실은 한편으..

친절에 대한 양가 감정

친절에 대한 양가 감정 내 이력이 좀 다양하다 보니, 친구들도 다방면에 걸쳐 있다. 학부 친구들은 선생님이 많고, 학보사 친구들은 언론 쪽에 많고, 사회학과 대학원 친구들은 탁월한 분석력으로 여러 곳에 퍼져 있다. 그들 그룹에서 뛰쳐나와 의사가 된 나는 그들과 아주아주 가끔 만난다. 나는 병원 이야기 말고 바깥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나이드신 부모님 때문에 병원 출입이 잦아진 그들은 ‘뭐니뭐니 해도 의사는 친절하고 설명을 잘 해줘야 한다’고 나에게 충고한다. 그들의 말이 백번 옳지만 사실 마음 속으로 울컥 치미는 뭔가가 있다. 40명이 넘는 환자의 주치의로 일하는 한 동기는 오전 내내 보호자와 보험회사 직원과 통화를 번갈아 하며 실갱이를 벌이고 있다. ‘그건 난소의 악성 종양이기는 하지만 난소암은 아닙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