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993

설사 레시피

변비 레시피에 비해 설사 레시피는 간단하고 다소 초라하다. 의학적으로는 설사 레시피가 더 중요하다. 설사를 많이 하면 탈수가 오고 금방 몸의 균형이 깨지기 때문이다. 항암제로 인한 설사는 변이 묽게 여러번 나오는 수준이 아니라 수도꼭지를 틀면 쫙 하고 물이 펌프질하듯이 쫙쫙 나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하루에 10번 이상이다. 환자가 말하기를, 처음에 물설사가 쫙쫙 나오다가 나중에는 물만 나온다고 말한다. 일부 항암제는 개발 이후 효과는 좋은데 설사가 심해서 그 임상연구에 참여했던 환자 중 65세 이상의 노인이 4명 탈수로 사망하여 약 승인이 취소된 경우도 있을 정도이다. 또 최근에 개발되어 나오는 여러 먹는 항암제 겸 표적치료제들이 설사가 심하다. 의사가 말하는 심한 설사라 함은 하루 6회 초과 하는 ..

변비 레시피

항암치료 중에는 장 운동이 비정상적이라 같은 약을 써도 누구는 변비, 누구는 설사가 생길 수 있다. 만성변비로 인해 그 고통을 아는 나로서는 환자들의 변비 방지에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변비방지의 중요성에 대해 과도하게 설명하는 편이다) 사소하게는 배에 똥이 많이 차있으면 속이 더부룩해서 식욕도 안생기고 조금만 수틀려도 구역감이 느껴지기 쉽기 때문에 변을 빨랑빨랑 빼주는게좋다. 심하게는 통증이 동반되고 통증에 동반되기 마련인 탈수때문에 똥이 토끼똥으로 변해 잘 배출되지도 않는다. 힘 주고 애 써봐도 헛발질. 그것이 몇번 반복되면 탈진으로 이어진다. 아주 이상한 느낌이 온다. 곧 나올 것 같은데 나오지 않으면서 몸의 톤이 이상하게 변한다. 그건 경험해본 사람만이 안다. --> 대처 및 예방법 물을 많이 ..

직무유기

먹는 항암제가 많이 개발되었다. 독성이 강한 항암제도 있고, 표적치료제도 먹는 약으로 많이 개발되고 있다. 환자들은 항암제를 주사로 맞지 않으면 심적 부담이 덜한지 먹는 항암제가 편할거라고 기대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매일 복용하는 것으로 체내 혈중 농도가 유지되는 약이라 항암제의 약효 뿐만 아니라 부작용에도 같은 농도로 노출되는 셈이다. 그래서 독성 관리가 중요하다. 부작용의 정도를 보고 약을 잠시 쉬거나 용량을 줄여서 환자에게 효과가 있으면서도 부작용이 없는 가장 적절한 용량으로 장기간 잘 복용할 수 있게 복약지도를 해야 한다. 그런데 집에서 먹는 약이라 환자 관리가 잘 안된다. 설사를 하거나 배가 살살 아프거나 입맛이 떨어진다는 등등의 이유로 환자가 한두끼니를 거르거나, 아예 안먹어 버리기도 한다..

환자는 전 존재를 걸고

설명의 의도는 좋았으나 본질은 결국 '나쁜 소식은 나쁜 소식이요 절망은 절망일 뿐'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기를 꺼려한 타협의 산물. 구구절절 희망의 언어를 듣고 싶어서 환자는 가슴 졸이며 이제나 저제나 정성스럽게 나의 이야기를 경청하지만 결국 아무런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럴 수도 있다' 이 병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에 대해 온갖 낙관을 늘어놓는 의사의 설명을 무너지는 가슴으로 듣는다. 치료 가능성에 중점을 두면 일련의 심리적 안정을 얻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의 질을 운운하는 집행유예. 세포 유전학의 평가가 암 진단에서 결론을 낼 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정보의 생물학 입문같은 어조. "심각한 병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어려운 시련이 될 수 있다"는 하나마나한 소리...

슈퍼맨을 위한 기도

과거 병력을 정리하면서 한줄 한줄 치료약제를 적고 어디가 나빠져서 약이 바뀌었는지 치료 중간중간 왜 입원했었는지 퇴원요약지를 들춰볼 때 혈압이 떨어지고 열이 나고 머리가 아프고 그 아프고 힘들었던 긴 시간들을 묻어버리고 아무일도 없었던 것인양 항상 단정한 옷차림과 분홍색 립스틱을 바르고 외래에 오시는 당신. 자꾸 기침을 하니까 불안한 내 마음. 물이 차고 빠지기를 몇 차례, 관을 넣고 빼기를 몇 차례 중간에 수술도 하고 보험이 안되는 비싼 약도 써 보고 약효가 아예 없으면 또 모르겠는데, 약을 쓰면 좋아지고 그러다가 조금씩 또 나빠지고 그렇게 하기를 몇년째 '이제 힘이 들어서요.항암치료를 안하는게 낫겠어요.' 힘들어 하는 환자에게 이제는 피검사 하자는 말도 하기 미안하다. 그래도 한번만 더 피검사 해보자..

뇌물에 약한 나, 고래가 되다.

오늘 항암치료 두번째 하러 오신 환자분. 엄마나이 또래 되신다. 내 또래의 딸과 같이 왔다. "항암제라는 거 생전 처음 맞아보셨는데, 좀 어떠셨어요?" "힘들었어요. 겨우 견뎠어요." "에이, 화장까지 예쁘게 하고 오신거 보니까, 괜찮으신거 같은데요!" 이런 저런 부작용을 체크하고 기록남기고 처방을 내느라 환자쪽으로 고개도 안돌리고 화면에 집중한다. 그러는 사이 환자는 부시럭 부시럭 가방을 뒤진다. 그리고는 큰 부채, 작은 부채 두개를 책상에 올려놓으신다. 진료하다가 더울 때 부치시라고, 크기별로 부채를 2개 준비해 오셨다. 난 사실 이런 소품을 잘 못 챙긴다. 비도 왠만하면 맞고 다닌다. 하도 우산을 잃어버려서. 장갑, 우산, 목도리, 모자, 손가방, 지갑, 수첩, 기타 등등 작은 소품들은 질질 흘리고..

써니의 하춘화

영화 써니에서 써니 멤버의 우두머리 격인 하춘화는 약 2개월 정도의 시간이 남은 암환자로 등장한다. 앞으로 살 날이 얼마남지 않은 그녀를 위해 친구들이 소식이 끊긴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 '써니' 멤버들을 찾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말로 쓰니 스토리 소재는 좀 진부한 것 같지만 직접 영화를 보고 나면 써니는 우리의 1980년대를 너무나 잘 재현해서 그동안 잊고 지냈던 가까운 우리의 과거와 약간은 촌스러운 그때를 회상하면서 웃음지을 수 있는 감동과 웃음을 동시에 선사해 주는 것에 그 맛이 있다. 가슴아픈 이야기, 그러면서도 웃긴 이야기, 그런 소재들이 잘 버무려져 있다. 춘화는 말기에 암으로 인한 통증이 이따금씩 찾아와서인지 병원에 입원해 있다. 그렇지만 그녀는 써니 멤버로 활약했던 20년전 솜씨를 발휘..

통증은 CT보다 예민하다

전이성 암환자의 치료가 효과적으로 잘 되고 있는지, 지금 쓰는 약을 계속 쓰는게 좋을지, 아니면 약을 바꾸는게 좋을지를 판단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CT 로 판단하는 것이 원칙이다. CT에서 보이는 병변의 크기가 몇 퍼센트 커졌는지 혹은 작아졌는지의 기준이 정해져 있다. 예를 들면 총 병변 지름의 합이 20% 이상 커지면 병의 진행으로 판단, 약제를 바꾸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기준을 적용할 수 없는 애매한 상황들이 종종 발생한다. 총 병변의 합이 약간 커지는 분위기인데 20%는 안될 때. 병은 조금씩 조금씩 커져가는 것 같고 - 그러나 '확실히' 나빠진 건 아니고 - 각종 피검사 수치들은 고만고만.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굳이 의사가 아니더라도 가족들이 보았을 때, 환자 스스로 생각했을 때 컨디션이 좋..

약한 고리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별 일 없는 줄 알았는데 남들 보기 멀쩡했는데 사실 우리의 일상은 아주 취약하다. fragile... 알고 보면 여기 저기 헛점 투성이다. 그래도 마스크도 덮어 씌우고 가면도 여러개 바꿔쓰면서 꾸려가며 사는게 인생이다. 인간은 person, 가면은 페르소나(persona). 결국 인간은 가면을 쓴 존재. 그런데 큰 병이 걸리면 그런 취약한 일상들이 금방 한계를 드러낸다. 병은 나의 약한 고리를 들추어 내는 계기가 되고, 거기서부터 일상의 균열이 시작된다. 그냥 보일듯 말듯 살짝 금이 간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벽이 갈라진다. 내 존재의 의미, 돈 문제, 가족의 갈등, 묵은 상처의 드러남... 가족의 누군가가 병에 걸리면 가족이 합심해서 환자를 돕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특별대우

9월1일부터 난 월화수목금 매일 외래를 보게 될 예정이다. 아직은 목요일 진료가 없다. 목요일은 미뤄둔 많은 잡일을 처리하고 각종 미팅, 약속을 잡는다. 그런데 환자들이 다른 과 진료보는데 나랑 같이 보는게 편리하다며 목요일에 같이 봐달라고 요청하시면 난 그냥 진료를 본다. 내 진료실이 없기 때문에 일반 진료실을 이용하거나 진료가 일찍 끝난 다른 방을 이용하거나 진료실이 아닌 공간을 이용할 때도 있다. 대학병원이라는 곳이 한번 접수하고 돈 내고 기다렸다 진료하고 또 돈내고 검사예약하고.... 여러 과를 봐야 하는 환자들은 미칠 노릇이다. 난 그래서 가능하면 편의를 맞춰드리려고 한다. 그런데 나의 성의와는 관계없이 내가 이런 식으로 진료하면 외래 간호팀이 힘들다. 자꾸 연락해야 하고 다른 교수님 진료를 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