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993

모든 숫자는 나에게서 예외가 되기를

한 보호자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환자에게 해당되는 모든 통계적 수치들이 우리 환자에서만은 예외가 되기를 바란다는 바램을 적어주셨다. 나도 그렇다. 환자에게 마음이 갈수록 환자 삶에 굴곡이 많을 수록... 평균보다는 예외에 기대를 건다. 나는 가끔 그런 예외의 환자를 보기도 하니까... 그러므로 함부로 비관적인 미래를 말씀드리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의사로서는 별로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희망은 중요한 것이지만 의사로서 환자에게 헛된 희망을 주는 것은 더 좋지 않다고 되어 있다. 나는 희망을 주는 의사가 되고 싶다. 일단 실력이 좋고 똑똑해야 한다. 항암제를 잘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끊임없이 쏟아져나오는 최신 지견들을 잘 챙겨야 하고 약제의 부작용과 효과를 잘 저울질할 수 있어야 한다..

고백

사실은 한 일주일전부터 홍삼성분의 영양제를 먹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푸하하 하며 웃는 분들이 대거 계실 것 같다) 친애하는 한 선생님께서 택배로 보내주셨다. 엄마가 몸에 좋다며 먹으라고 했으면 단칼에 거절했을거다. 그런거 안먹어도 현재 영양 넘치는게 문제라며. 근데 이걸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선생님께서 택배로 손수 보내주시니 솔깃하다. 편지까지 동봉해주신 그 정성으로 인해 placebo 효과가 40% 이상 약효를 올리는 것 같고, 피곤함을 개선하는데 도움을 보셨다는 선생님의 코멘트로 인해 2알 먹자마자부터 잠이 안오는 것 같다. (나의 얄팍한 귀여!) 의사들이 너무 영양의학에 소홀한 것 같다는 말씀에 백분 동의한다. 나도 잘 모른다. 영양까지 신경쓰기에 의사는 병에 매몰되어 산다. 실험실 접시에 암세..

이번엔 영어로! 궁하면 통하느니...

유방암 재발이 의심되는 48세 여자환자. 보호자 없이 환자 혼자 와서, 입원하시라고 해놓고도 어째 찜찜하더니 오늘 남편이 왔다. 나의 계획을 듣고 싶어서 왔다고 한다. 환자가 병원에 입원하는걸 큰 스트레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입원을 안하거나 짧게 했으면 좋겠다고... 이들은 인도인들. 부인은 2003년에 이탈리아에서 유방암 수술을 했는데 그때 항암치료 6번 하고 고생많이 했다 한다. 그리고 그때 항암제 부작용으로 심장기능이 확 떨어져 우리병원 심장내과를 다니던 중에 - 상당히 오래 다니셨다 - 한쪽 팔이 자꾸 부어 혈전증을 의심하여 CT를 찍었는데, 증상과는 상관없이 흉강 내 재발이 의심되는 림프절이 관찰되어 종양내과 진료를 보시게 되었다. 우리병원을 꽤 오래 다니셨지만, 종양내과 치료관련 기록은..

너무 괜찮은 척 하느라 애쓰지 마세요

말을 걸면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대답을 잘 못하면서도 괜찮다고 하신다. 어디 불편한데 있으시냐고 물어도 다 괜찮다고, 견딜만하다고 하신다. 병을 진단하고 병기를 결정하기 위해 이러저러한 검사를 하는 중인데 별 말 없으시던 환자분이 나에게 언제 항암치료를 시작할 거냐고 물으신다. 치료 시작하기 전에 해결할 일들이 있으시다며 하루 이틀 여유를 줄 수 있냐고 조심스럽게 물으신다. 그래도 될 것 같다고... 환자는 조용히 외출을 다녀온다. 원래 하시던 일을 마무리하고 치료를 시작하고 싶으시다고 했다. 가족들도 말은 별로 없지만 다들 신경이 곤두서있는게 느껴진다. 회진을 가면 남편과 자식들은 '의사선생님께 다 말씀드려. 어디어디 불편한지...' '아이 참, 괜찮아요 이 정도는... 많이 좋아진거에요. ..

용서와 사랑

1990년 학력고사시절, 시험을 보고 대학에 입학했고 졸업 후 대학원 시험을 4번 보았다. 석사 2번 박사 2번 (말못할 사연이 길다) 그 사이에 과정별 논문제출자격시험, TOEIC, TOFLE, TEPS 등등의 영어시험도 여러번 보았다. 박사 과정에 입학하기 전에는, 먹고 살 걱정에 취직을 하는게 낫겠다 싶어 취직시험도 몇군데 봤다. 2000년 이후 의과대학 입학시험을 보고 의대생이 되었다. 수백번의 시험을 쳐서 매년 겨우겨우 진급을 하였다. 몇날밤을 세웠던가. 그리고 의사국가고시를 보고 의사가 되었다. 인턴이 되기 위해, 내과전공의가 되기 위해 필기시험도 보고 면접시험도 보았다. 내과전문의 시험을 보고 내과 전문의가 되었다. 하필 내과는 세부 분과가 있어서 나는 혈액종양내과 분과 전문의 시험을 보아야..

검사 처방

엊그제 응급실에 왔다 간 환자. 환자가 힘들어서 응급실 왔다가 루틴 랩을 다했다. 피건사 엑스레이 심전도 소변검사... 큰 문제 없고 증상도 좋아져서 응급실에서 입원하지 않고 기본 사항만 체크하고 귀가하셨다. 그리고 오늘 입원하였다. 항암치료 해야하니까. 인턴은 별 생각없이 신환 오더를 다 냈지만 난 EMR을 들여다 보고 있다가 필요없는 랩을 다 지운다. 소변검사 심전도 엑스레이 ... 피검사 중에서도 화학검사는 별로 달라질게 없는 환자. 환자가 필요없는 검사 하는거 싫고 불필요하게 찔러서 채혈하는 것도 싫다. 그래서 내가 검사를 다 취소했다. MRI PET-CT 등등 대학병원의 고가검사. 암환자는 5%만 내면 되기 때문에 사실 경제적으로 큰 부담은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불필요한 검사는 할 필요 없다..

진단 3일만에

아마도 개인사적으로 많은 일이 몰아닥쳐 자신의 몸과 건강을 챙겨볼 시간이 없으셨나보다. 체중이 많이 빠지고 기운이 너무 없어서 종양내과도 아닌 내분비내과에 갔다가 심각한 폐전이, 뼈전이가 의심되며 전이를 일으킨 원발병소를 찾아야 하는 시점에 우리병원으로 오셨다. 외부병원에서 기본 CT를 흉부, 복부 찍으신 상태이다. 보균자였고, CT상 간의 음영이 정상이 아니었으며 간의 크기가 매우 컸다. 간암에 특이적인 종양표지자 검사를 해보았더니 우리병원 최대치를 넘어선다. CT 소견과 종양표지자 검사로 간암을 진단할 수 있었다. 조직검사를 하지 않아도. '눈감고 앞으로 나란히' 해보았다. 간성혼수도 나타나고 있다. 간기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병원에 오실 때부터 산소를 6리터 이상 하고 있..

모범환자 1호

오늘 처음 뵙는 환자분. 68세니까 그리 젊지 않다. 그리 늙었다고 보기도 뭐하다. 그렇지만 이제 할머니가 막 되어가는 것이 느껴지는 외모 처음 유방암 진단을 받았을 때 3기 그래서 항암치료 하고 수술하셨다. 지금은 방사선치료를 마치고 허셉틴만 맞고 계신다. 연수가시는 손주혁 선생님께 치료받다가 이제 내가 진료하게 되었다. "허셉틴 맞는건 힘들지 않으시죠?" "그럼요 괜찮지. 이제 살거 같아." "뭐 다른 거 어려운 점은 없으세요?" "(림프부종 때문에 재활의학과에서 운동교육을 받으셨나보다) 꼭 이거 30번만 해야 하나? 내가 좀 더해보니까 좋던데. 해보니까 연습할수록 팔이 점점 더 많이 펴지고 잘 올라가." "더 하셔도 상관없을 것 같아요. 어차피 다 스트레칭이고 운동되는거 아닐까요? 더 하셔요" "난..

폐 하나로 마라톤을 완주하신 68세 근육질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임상연구로 항암치료를 받으셨던 분들은 평소 문제가 있거나 불편한 점이 있을 때 임상연구간호사들과 전화를 하면서 치료를 받으셨던 터라 치료가 끝난 후에도 궁금한 점이 있으면 연구간호사선생님들께 전화를 자주 하시는 모양입니다. 당장 환자가 병원에 올 정도도 아니고 올 필요도 없지만 궁금한게 생기니 임상연구간호사 선생님들이 저에게 대리로 질문을 많이 합니다. 치료가 일단 끝났는데 흑염소 먹어도 되냐고... 홍삼을 다려 먹어도 되냐고 민들레 물 먹어도 되냐고 저는 우리나라에 엄청나게 많은, 이름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좋은 음식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의사가 단칼에 '노'하면서 '그런거' 드시지 말라 해도 사실 환자들은 '알아서' 다 드시고 있기 때문에 저는 가능하면 환자가 제 뜻을 이해하시게 설명하려고 하..

남편들의 메일을 받으면

나는 유방암을 처음으로 진단받은 환자와 면담할 때 남편이 있는 분들은 가능하면 남편도 함께 대동하시도록 한다. 환자와 남편을 앞에 두고 병기, 예후, 치료방침, 치료시 주의사항을 설명한 다음 남편에게 당부하는 말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치료를 시작할 때는 다들 잘 해주지만 시간이 지나면 멀쩡히 잘 치료받고 견디는 아내를 보며 슬슬 마음도 안심되고 처음의 충격도 가시기 때문에 도와주고 보살펴주려는 마음도 약해지기 때문이다. 사실 환자들은 치료를 마치고 더 힘들다. 재발의 위험성에 대하 공포심이 제일 큰 부담이고 몸이 완전히 정상이 될거라는 기대감이 컸는데 상당히 오래동안 후유증에 고생하기 때문도 있고 치료 후에 폐경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애매한 폐경 후 증상들 때문에 설명할 수 없는 불편감도 크고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