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주치의일기

뇌물에 약한 나, 고래가 되다.

슬기엄마 2011. 7. 18. 17:13

오늘 항암치료 두번째 하러 오신 환자분. 엄마나이 또래 되신다. 내 또래의 딸과 같이 왔다.

"항암제라는 거 생전 처음 맞아보셨는데, 좀 어떠셨어요?"
"힘들었어요. 겨우 견뎠어요."
"에이, 화장까지 예쁘게 하고 오신거 보니까, 괜찮으신거 같은데요!"

이런 저런 부작용을 체크하고 기록남기고 처방을 내느라
환자쪽으로 고개도 안돌리고 화면에 집중한다.
그러는 사이 환자는 부시럭 부시럭 가방을 뒤진다.
그리고는 큰 부채, 작은 부채 두개를 책상에 올려놓으신다. 
진료하다가 더울 때 부치시라고, 크기별로 부채를 2개 준비해 오셨다.

난 사실 이런 소품을 잘 못 챙긴다.
비도 왠만하면 맞고 다닌다. 하도 우산을 잃어버려서.
장갑, 우산, 목도리, 모자, 손가방, 지갑, 수첩, 기타 등등
작은 소품들은 질질 흘리고 다닌다.
그래서 아예 안가지고 다닌다.
장갑도 안끼고 목도리도 안하고 지갑도 딱 카드 서너장 들어가는 얇고 작은 걸로 해서 바지 뒷호주머니에 넣어 다닌다. 안그러면 잃어버린다. 지갑에는 돈을 넣으면 안된다. 항시 잃어버릴 수 있어서 가방 여기저기에 돈을 숨겨둔다. 지난번 미국 학회에서는 아이팟도 잃어버리지 않았겠는가...전화기도 수 차례...

내 생전에 부채라고는 부쳐본 적이 없는데. 
부채에 네임펜으로 이름과 전화번호를 썼다. 그리고 가운에 넣어가지고 다니기로 했다.
환자가 준거라 뿌듯하다.
딸이 그런다.
엄마가 병원에 왔다 가시면 기운이 나 하시는거 같다고.
항암치료도 안 받으실려고 했는데, 병원 다니는게 그리 싫지 않으신거 같다고.
딸이 그렇게 칭찬 추임새를 넣어주니, 갑자기 돌쇠의 힘을 발휘하고 싶다.
월요일 오후. 환자가 날 춤추게 한다. 칭찬받은 고래가 되었다.
비록 지난 주말은 비가 오고 꿀꿀하였지만, 오늘은 새로운 해가 쨍쨍 떴으니 이번 한주를 잘 시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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