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993

러시아 엄마

러시아 환자들은 옛날 한국 사람들이랑 정서가 좀 비슷하다. 진료 올 때 빈손으로 오지 않고 작은 러시아 인형, 초콜렛, 보드카 그런 선물을 주신다. 양이나 질이 풍요롭지도 않다. 그냥 성의다. 내 방 창가에 러시아 환자들이 준 인형들이 올망 졸망 모여있다. 진료실을 나갈 때는 내 손을 꼭 잡고 고맙다고 하신다. (러시아로 고맙다-스파 씨바-는 말을 알아먹을 수 있게 되었다) 전이성 유방암인 경우에는 진료 계획을 명확하게 세우고 치료를 시작하기 어려운 것에 반해 수술을 하고 4번에서 8번 정해진 항암치료를 하는 환자들을 진료하는 것은 훨씬 수월하다. 설명하기도 어렵지 않고. 물론 환자의 비행기 시간, 일정에 진료를 맞춰줘야 한다. 그래서 사실 성가시고 귀찮은 일들이 부가적으로 발생한다. 영문 소견서도 엄청..

명상 프로그램을 마치고

애초 계획과는 달리 난 우리 병원 명상프로그램에 끝까지 참석하지 못하였다. 한 세션 당 2시간 정도가 소요되었고 명상 중에는 핸드폰을 꺼 놓을 수 있어야 하는데 난 그럴 수가 없었다. 6주간의 프로그램을 마치고 명상 선생님과 일단 간단하게 평가하였고 설이 지나고 총평가를 하기로 했다. 중간에 병이 나빠져서 입원한 환자 컨디션이 좋지 않아 매번 참석하지 못한 환자 매번 모임의 분위기는 그런 환자들로 인해 조금씩 어색함과 긴장이 감돌았다. 나도 마음이 이렇게 흔들리는데 병이 나빠진 환자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다른 환자들의 마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명상 선생님이 잘 이끌어 주셨고 환자들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해주었다. 총 평가를 준비하면서 환자들에게 땡큐메일을 보내려고 한다. 나의 이런 어줍잖은 시도..

빨간 립스틱

환자들이 모두들 두꺼운 외투를 입고 두툼한 머플러를 두르고 병원에 오신다. 바깥 날씨가 점점 추워진다. 겨울의 한복판이다. 눈발도 자주 날리고 바람도 매섭다. 중앙냉난방식인 외래방도 온도조절이 잘 안되는지 기온이 썰렁하다. 멋진 갈색 털외투와 회색 머플러를 하고 온 환자. 항암치료 중인데 반응이 좋아 요즘에는 표적치료제만 맞고 계신다. 머리카락이 다시 나기 시작해서 내 헤어스타일하고 비슷하다. 다시 난 머리카락 색깔이 회색이라 옷 색깔하고 머리카락 색깔하고 잘 어울린다. 외투 멋지세요. 머리카락색이랑 머플러랑 세트네요. 활짝 웃으신다. 누가 줬어요. 이렇게 멋진 외투를 누가 줘요? 남들이 뭐든지 조금씩 날 위해 집어주네요. 외투도 누가 입다가 줬구요 머플러도 선물 받은거에요. 아프다고 하니까 날 조금씩 ..

가족을 한번 만나볼까요?

58세 여자 환자. 유방암이 재발한 지 벌써 4년이 넘었다. 뇌로 전이된 것도 2년이 넘었다. 환자는 늘 혼자 병원에 다닌다. 그리고 항상 불평불만이 많다. 왜 기침이 안 멈추냐? 폐에 병이 있어서 그래요. 일단 증상이 좀 가라않도록 약을 처방해 드릴께요. 코데인? 그거 먹어도 낫지도 않아. 처방하지 마. 집에 많아. 항암치료는 언제까지 할거냐? 지금 치료약에 반응이 좋은 편이니까 당분간 유지할 생각이에요. 별로 독성도 없잖아요. 언제까지 치료할 거라고 단정적으로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병이 나빠질 때까지 이 약으로 치료하다가 나빠지면 다른 약으로 바꾸는 거라고 몇번 말씀드렸지만 별로 염두에 두시지 않는 것 같다.) 왜 이렇게 검사는 자주 하냐? 최소한 3개월에 한번은 해야 되요. 무엇보다 약을 쓰면서 환..

2012년의 블로그

2011년을 시작할 때 난 내 삶에 소박하지만,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목표가 있기를 희망하였고 가장 해보고 싶었던 작은 소망 중 1번을 환자와 함께 하는 블로그하기로 정하였다. 컴맹인 내가 블로그 만들기를 시도해보다가 어려워서 양광모 선생님을 찾아가 떼를 썼다. 블로그 하나 만들어주세요. 그냥 글만 쓰면 되게 세팅해서요. 그렇게 하여 2011년 3월 1일부터 시작한 블로그. 예전에 청년의사에 기고했던 글은 슬기엄마의 일기로 분류해서 올렸다. 그리고 이후에 블로그에 쓰는 글은 그날 그날을 살아가는 나의 일기가 되었다. 환자를 진료하며 느낀 점, 환자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들, 의학 정보, 항암치료의 부작용과 어려움, 그리고 대처법 등을 환자와 함께 공유하는 것이 한 축이라면 (유방암 길라잡이) 암환자를 ..

Doctor's diary (1)

'Do no harms' that's your greatest gift in mankind. 1987년 하버드 의과대학에 입학한 7명의 학생을 21년간 영상으로 추적관찰한 미국 PBS의 다큐프로그램이다. 미국에 사는 친구가 이 다큐 DVD를 선물로 보내주었다. 식도암 치료를 받는 아버지 때문에 이런 저런 의료정보를 찾던 중에 이 프로그램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 다큐를 보고 나서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며 나에게 선물로 보내주었다. 그 다큐의 시작은 'Do no harms' that's your greatest gift in mankind. 라는 말로 시작된다. 의과대학 1-2학년 예외없이 해부학 수업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처음 실습을 시작하는 그들은 약간 울먹울먹하기도 한다. 시신..

주치의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앞으로 의사를 계속 한다면 그것은 이런 말을 듣고 싶어서 일거다. 선생님, 저의 주치의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난 품고 있는 큰 뜻도 없고 이루고 싶은 큰 일도 없으며 별다른 야망도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나에게 치료받는 환자가 다른 환자보다는 좀더 편안하게, 좋은 마음으로 치료받을 수 있으면 된다는 그런 마음이 가장 클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 어떤 일도 다 미루고 환자를 보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인생사 매순간,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되 안되 를 따져본다. 이건 이래서 될 것 같고 이건 이래서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사는 것이다. 잔머리 굴려도 결국은 궁극적인 철학과 인생관에 의해 대안을 선택하게 된다. 합리적인 판단에 의한 선택이라기 ..

전공의의 기침

몇일 전부터 우리 전공의가 기침을 계속 한다. 매일 조금씩 더 심해진다. 처음에는 검사 좀 해보지 그래요? 난 그렇게 썰렁하게 말만 하고 병동에서 일회용 마스크를 찾아 던져주었다. 이거 쓰고 다니세요. 환자볼 때 기침하면 안 좋아요. 호흡기 감염이 있을 수 있으니까 (아! 무심한 교수님의 코멘트!) 그런데 오늘 보니까 영 기침이 심하다. 나한테 말을 제대로 잘 못할 정도다. 우스개소리로 그 파트에서 일하기 싫으면 몸이 반응하죠. 윗사람이랑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으면 막 기침이 나오는거에요. 그러다 파트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침이 멈추죠. 실재 그런 전공의가 있었어요. 라며 농담을 했지만 농담으로 넘기기에 기침이 매일 조금씩 심해진다. 결국 아침 회진을 마치고 둘이 나란히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일단..

첫 만남의 중요성

오늘 입원한 환자. 염증성 유방암이다. 이미 간이나 뼈에도 전이가 되었다. 환자는 증상이 전혀 없다. 수술을 위해 검사를 하다보니 전이가 발견되었다. 수술할려고 병원에 왔는데 별 설명없이 검사를 잔뜩 하고 나서 외래에서 나를 만나게 된 가족. 왜 수술 안하고 내과 진료를 보게 되었냐고 공격적으로 질문하기 시작한다. 두 아들은 약간 화가 나 있고 검사 결과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듣기를 원한다. 처음 본 나에게 너무 많은 질문을 한다. 사진을 보여드리기는 했지만 환자도 그렇고 자식들도 별로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다. 그래서 입원하기로 했다. 외래에서는 도저히 해결될 것 같지 않다. 4기 전이성 유방암, 그중에서도 염증성 유방암은 특히나 예후가 매우 좋지 않다. 평균 수명을 넘기기 어렵다. 항암제 반응도 별로 ..

양초를 켜며...

한 환자분이 직접 만든 양초를 선물로 주셨어요. 좋은 향이 나는 양초에요. 그 양초를 하루종일 켜놓고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지금 방안에 그윽한 향 가득입니다. 피부에 좋다며 보이차와 차주전자를 같이 선물해 주신 분도 계셔서 차도 우려내서 마셨어요. 크리스마스 잘 보내라고 주신 맛있는 파이도 같이 먹었습니다. 할 일이 많지만 오늘은 병원에서 의학이랑 관계없는 책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재충전이 되었을 거라고 믿습니다. 크리스마스인데도 오늘 입원하신 분이 4명이나 있네요. 상태가 않좋아진 환자들도 있어서 3 가족과 함께 면담했습니다. 치료의 희망을 갖고 입원하신 분 평화로운 임종을 준비해야 하는 분 치료 후유증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는 분 그렇게 병원에서 성탄절을 보내는 분들이 계시네요.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