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993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려면...

할머니가 돌아가셨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다른 가족 면담을 하였다. 그들도 애타는 마음으로 지금 환자의 상태를 궁금해 하고 앞으로 치료계획이 어떤지 알아야 하니까. 가족들이 다 모여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의사가 시키는 대로 치료를 다 했는데도 왜 재발했는지. 왜 잘 유지되고 있다고 했는데 느닷없이 다른 곳으로 전이가 되었는지. 세상에 좋은 항암제가 많이 개발되고 있다고들 하는데 우리 환자에서는 효과적인 항암제가 없다고 하는지. 환자와 가족들은 그저 나의 어려운 설명을 들을 수 밖에 없다. 나의 제안을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주치의이기 때문에 뭔가 치료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과학적 근거와 퍼센트, 가능한 시나리오를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는 치료가 많지는 않다. 그런 치료가 많다면 암으로..

죽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들

오늘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다. 아흔이 넘으셨다. 가족들은 진작에 다 마음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창 컨디션이 좋았는데 갑자기 Cancer stroke 이 오고 나서 말씀을 잘 못하시게 되었다. 영상검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임상적으로 암으로 인한 혈전증이 뇌혈관에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폐렴이 동반되었다. 아마 사인은 폐렴이 될 것이다. 성당을 열심히 다닌 외할머니. 성서 필사를 2번이나 하셨다. 대학노트 10권도 넘는 분량의 필사를 2번이나 하신 셈이다. 노트를 보니 한자의 오자도 없고 수정액도 안 쓰셨다. 줄도 반듯이 잘 맞추셨다. 노인이 대단한 정신력이라며 온가족이 혀를 내둘렀다. 장례를 하게 되면 발인하는 날 아침에 외할머니가 다니던 목포 성당의 10시 미사를 맞추기로 했다. 자식들이 ..

괜히 항암치료 했어요

이렇게 힘든 건줄 알았으면 항암치료 안하는게 나을뻔 했어요. 항암치료 하기 전까지는 잘 먹고 잘 걷고 괜찮았는데 이게 뭐에요.... 부인의 넋두리. 아침 회진 때 엉엉 우신다. 그냥 우시도록 놔 둔다. 넋두리를 할 때는 들어드리는게 좋다. 거기다 대고 무슨 설명을 해도 내 말을 들을 겨를이 없다. 환자가 나빠지면 1. 병이 나빠지기 때문에 상태가 나빠지는 것인지 2. 치료와 관련하여 치료부작용과 합병증 때문에 컨디션이 나쁜 것인지 3. 현재 병과 무관하게 다른 병이 생겨서 상태가 나쁜 것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4기 암환자 상태가 나빠지면 대개 1번과 관련하여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2번에 대한 대책이 미흡해지기도 쉽고 3번의 원인을 미쳐 찾지 못한채 1번으로 원인을 돌려버리기도 쉽다. 4기 암환자들은 기..

고객만족도 평가

오늘 누런봉투에 들어있는 2011년 의료진별 고객만족도 조사결과 보고서를 받았다. 의료진별로 환자 10명씩 총 3000천명을 조사한 결과라고 한다. 조사 항목 중 나의 평균 미만 항목은 (평균은 85점이라고 한다) 진료대기시간 74점 진료예약 후 대기시간 76.8점 수술 및 시술 대기시간 82.7점 면담용이성 82.8점이었다. (사실 이게 좀 이해가 안간다. 난 여러 형태로 면담을 진행하고 있는데... 인터넷으로도 매일 상담하고, 심지어 상태가 않좋은 환자에게 내 핸드폰 전화번호도 알려주고, 가족들 퇴근 시간 맞춰서 밤에도 면담하고, 주말에 시간 된다고 하면 주말에도 병동에서 면담을 하고 있는데 더 용이하게 해야 하나?) 보고서에서는 대기시간 및 면담용이성, 응급상황 시 조치 등의 만족도가 낮게 평가되었..

의사가 건강해야

사실 특별히 어디가 아픈건지는 모르겠다. 그냥 만성피로려니 하고 있다. 2년전에 항문에서 자꾸 피가 나고 아파서 대장대시경을 했다가 아주 기분 나쁘게 생긴 폴립이 있었는데 조직검사를 못했던 적이 있어서 대장내시경을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매일 외래가 있으니 검사를 미루고 있다. 직장검진하라고 메일이 날라오는데 검사날짜를 못 잡겠다. 목요일부터 매우매우 피곤하다. 회진돌거나 외래를 볼 때도 자꾸 어지럽고 식은땀이 난다. 오늘은 회진을 도는데 너무 어지러웠다. 나는 심리적인 요인이 있으면 신체적인 증상이 나타나는 Neurotic한 면이 있는데 아마 그때문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입원환자들 중 위중한 환자가 많다. 이제 치료를 그만하자고 말해야 하는 환자들도 많다. 그런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

통증 회진

우리병원 호스피스 팀이 올 2월부터 4월까지, 3개월간 국가에서 시행하는 '산재형 호스피스'에 관한 시범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산재형 호스피스란 병동형 호스피스가 호스피스 환자만 한 병동에 모아 한 주치의 밑에 입원하여 진료를 받는 시스템인 것에 비해 호스피스 환자가 일반 다른 환자들과 함께 입원하고 있으면서 자신의 원래 주치의를 변경하지 않고 호스피스 케어가 추가적으로 제공되는 형태를 말한다. 병동 여기저기 환자가 흩어져 있다는 의미에서 '산재형'이라고 명칭이 붙여졌다. 병동형은 호스피스 환자만 모여있으니 나름의 장점이 많이 있지만 오랜기간 자신의 치료를 담당하던 주치의가 변경되고, 호스피스 치료를 결정하는 순간, 일반 치료는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임종 준비만을 하는 것으로 오해되기 쉽..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원래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환자를 직접 보고나면 생각이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다. 원래 더 이상 유용한 항암제가 없으니 보존적 치료를 하시면 되겠다고 썰렁하게 답변을 달고 협진을 마감할 생각이었다. 내가 유방암을 좋아하는 이유는 가용한 항암제 종류가 많고 약을 잘 쓰면 불사신처럼 다시 좋아지는 환자들이 꽤 많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의사로서 보람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 '간지나게' 찾아온다는 말이다. 폐 여기 저기 얼룩덜룩, 기침을 콜록, 정상 조직은 보이지도 않게 간전이가 심했는데 세번째 주기를 마치고 CT를 찍었더니 놀랍게 좋아지는 경우 전신 뼈로 전이가 되어 통증이 심해 꼼짝도 못하던 환자가 호르몬제 먹고 2주만에 가뿐해지는 경우 뇌로 전이가 되었는데 방사선치료 하고 굳세게 다시 항암치료를 시작해 3..

눈빛만 보아도

환자를 호명하고 환자가 대기석에서 진료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는 동안 나는 EMR을 띠우고 재빨리 오늘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피검사 결과를 확인한다. 오더를 마구 내기 시작한다. 어제 낸 오더에 부족한게 있으면 환자가 자리에 앉기 전에 잽싸게 오더를 더 내야 한다. 그러나 내가 환자 움직임보다 속도가 늦으면 환자가 자리에 앉아서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기다리게 된다. 화면만 보면서 말한다. 잠깐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죄송합니다. 오더정리가 끝나면 나는 자세를 돌려 환자를 마주본다. 그리고 그의 눈을 응시한다. 눈빛은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눈빛만 보아도 그 사람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을 때가 있다. 나는 환자들의 눈빛을 보면 그들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을 때가 많아 졌다. 항암..

치료 부작용 어디까지 설명하는게 좋을까?

환자는 유방암을 진단받고 너무 두려웠나보다. 상세한 설명없이 당장 수술은 어려우니 항암치료를 받으라는 말에 나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보다 생각하고 병원을 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났다. 유방 크기만큼 암이 커져 버렸다. 통증이 심해서 병원에 다시 오셨다. 겨드랑이와 유방에 병이 있었는데 병원에 오지 않았던 지난 4개월동안 많이 커졌다. 서둘러서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예민한 환자라 말 한마디 조심하는게 필요했다. 항암제 부작용, 치료 과정 중에 생길 수 있는 합병증 이런 설명을 너무 많이 하면 또 겁 먹고 항암치료를 거부할 것 같다며 자식들이 부탁한다. 환자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완화하여 설명했으면 한다고... 나도 동의했다. 항암 치료 중에서는 수많은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지만 그걸 ..

결국 운명 아닌가요?

그녀와의 인연은 1년이 채 안되었다. 전이성 유방으로 진단받고 첫번째 약제 탁솔로 항암치료를 하는 중에 나를 만났다. 그녀는 만화도 그리고 시각 디자인을 하는데 탁솔을 쓰는데도 손발저림증을 이겨내며 작업을 계속 하고 있었다. 처음 쓴 탁솔을 잘 견디길래 조금만 더 쓰다가 호르몬제로 바꿀까 생각하던 차에 병이 나빠져 버렸다. 그래서 아드리아마이신을 포함한 약제로 변경하여 다시 항암치료를 시작하였다. 그녀는 병이 좋아지기만 하는게 아니라 나빠지기도 한다는 걸 처음 경험하고서는 나에게 전이성 유방암의 예후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한다. 전 언제까지 항암치료 하는 건가요? 병이 나빠질 때까지요. 끝이 없네요. 엄밀히 말하면 그래요. 그래도 호르몬제로 바꾸면 항암효과, 치료적 효과는 있지만 독성은 거의 없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