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죽음을 준비하는 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슬기엄마 2012. 1. 31. 20:53


원래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환자를 직접 보고나면 생각이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다.
원래 더 이상 유용한 항암제가 없으니 보존적 치료를 하시면 되겠다고 썰렁하게 답변을 달고 협진을 마감할 생각이었다.


내가 유방암을 좋아하는 이유는
가용한 항암제 종류가 많고 약을 잘 쓰면 불사신처럼 다시 좋아지는 환자들이 꽤 많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의사로서 보람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 '간지나게' 찾아온다는 말이다.
폐 여기 저기 얼룩덜룩, 기침을 콜록, 정상 조직은 보이지도 않게 간전이가 심했는데
세번째 주기를 마치고 CT를 찍었더니 놀랍게 좋아지는 경우
전신 뼈로 전이가 되어 통증이 심해 꼼짝도 못하던 환자가 호르몬제 먹고 2주만에 가뿐해지는 경우
뇌로 전이가 되었는데 방사선치료 하고 굳세게 다시 항암치료를 시작해 3년 넘게 집안일 다하고 씩씩하게 외래다니며 치료받는 경우
정말 불사조들이다.
이런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약제를 선택할 때는 다 근거가 있다. 선행 연구, 메타 분석, 근거 기준이 잘 제시되어 있다. 난 그래서 유방암이 좋다!
임상 연구 및 기초 연구가 많이 되어 근거를 가지고 선택할 수 있는 약제의 폭이 넓다. 난 그래서 유방암이 좋다!
불사조 유방암 환자들이 좋다!

이에 반해 전이가 된 자궁경부암, 난소암, 자궁내막암 등 여성암의 경우 입증된 항암치료 약제가 기껏해야 2-3가지에 불과하다. 이런 약들을 다 쓰고나면 그때부터는 근거가 확실하지 않은 약제 선택을 해야 한다. 치료 효과가 높지 않을 거라는 예상 때문에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신약도 거의 개발되어 있지 않다. 그나마 난소암에서 혈관생성억제제인 아바스틴이 최근 효과가 입증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비보험이라 한번에 4-5백만원이 들고, 그나마 임의비급여라 처방하면 불법이 된다.

게다가 나와 처음부터 치료를 시작한 환자가 아니라 산부인과에서 치료를 시작하고 진행하다가 나빠져서 나에게 협진의뢰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나와 신뢰관계도 없고 라포도 없다. 한창 컨디션 좋지 않을 때, 환자가 힘들 때, 나는 그들을 만나야 한다. 그래서 힘들다. 
내가 도전해볼만한 항암제가 남아있지 않으면 환자를 만나고 싶지 않다. 내가 의사로서 해줄 수 있는게 뭘까? 친절한 설명, 따뜻한 말한마디. 나는 종양내과 의사라서 항암제가 좋다. 좋은 항암제로 환자를 낫게 해주고 싶다. 따뜩한 말한마디로 환자가 좋아지지 않는다는 거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오늘 협진난 환자를 EMR로 보면서 전과받지 말고 그냥 산부인과에서 치료하라고 해야겠다 마음 먹었다. 그렇게 힘든 환자에게 최선을 다해 마음을 다해 진료하기에 나는 요즘 너무 지쳐있다.

그런데...

환자를 보고 오니 마음이 바뀌었다. 전과받고 통증 조절을 하기로 했다.
어제는 환자가 아파서 끙끙 앓다가 겨우 잠들었다고 해서 진료를 못하고 오늘 저녁에 갔더니 환자가 젖어있다. 난 일단 환자랑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진찰을 하고 방문을 나서는데 어머니가 따라 나오신다.
오늘 저 아이가 우리 몰래 주사를 다 뽑고 밖에 나갔다가 누군가에게 발견되서 겨우 찾아왔어요.
환자는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병원 밖으로 뛰쳐나갈려고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통증도 조절되지 않고,
어제 찍은 사진에서 병이 더 나빠졌다는 사실을 듣고
그 마음의 절망을 어쩔줄 몰라서 그랬으리라.
진통제를 다 바꾸고
밤에는 신경안정제를 먹고 잠도 재워야겠다.


환자를 위하는 마음을 가질려면 내 마음에도 그를 지지할만큼의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에너지는 가만히 쉬면서 책상앞에 있는다고 나오는게 아니라
환자를 보면 나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