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죽음을 준비하는 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왕왕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암

슬기엄마 2012. 1. 16. 00:09


지금 입원해 있는 환자 중
80세가 넘으신 유방암 할머니, 유방암 할아버지, 그리고 90세가 넘으신 폐암 할머니가 계신다.

유방암은 가능한 조직검사를 해서 호르몬 수용체, HER2 수용체 여부를 확인하면 세부 유형이 결정되는데, 유형에 따라 독한 항암제를 쓰지 않고도 항호르몬제나 표적치료를 통해 병을 어느 정도는 다스릴 수 있다. 성적도 꽤 좋다. 게다가 유방 조직검사는 별로 위험하거나 어렵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왕왕 할머니 할아버지라 하더라도 환자를 설득해서 검사를 진행해야 한다.


유방암 할아버지는 다른 병원에서 1차 검사를 해서 유방암이라는 것은 진단이 되었지만 더 이상 가용한 조직이 없어서 수용체 검사를 하지 못하였다. 할아버지는 조직검사를 한 후에 종양이 커지고 통증이 심해졌다면서 죽어도 재검사는 안하시겠다고 한다. 통증이 심한 어깨랑 겨드랑이 종양에 방사선치료만 하고 있다.


유방암 할머니는 겨우 설득해서 조직검사를 했는데 호르몬수용체, HER2 수용체가 모두 음성인 삼중음성유방암으로 진단되어 애초에 예상했던 손쉬운 치료를 적용할 수 없게 되었다. 낙심. 항암치료는 못할 것 같다. 뼈로 전이가 심하고 특히 다리에 전이되어 골절될 위험이 있어 예방적 방사선치료 겸 골반 통증이 있는 부위로 방사선치료만 하기로 하였다.


폐암 할머니는 조직검사를 못했다. 통증 조절이 잘 되지 않고 진통제에 너무 예민하다. 조금만 약을 증량하면 진통제에 취해서 의식이 흐려지고, 조금만 약을 감량해도 통증이 심해져서 아프다고 아우성이시다. 먹는약, 붙이는 진통제로는 조절이 어려워 입원하여 주사로 소량씩 진통제를 변경하면서 통증을 조절하고 있다. 폐암도 조직을 얻어서 EGFR 유전자 검사를 하면 먹는 항암제 이레사 등을 쓸 수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있고, EGFR 유전자 변이가 있으면 힘들지 않게   먹는 약으로 치료하면서도 효과도 좋을텐데, 지금 조직검사를 할 컨디션이 안된다. 가끔 헛소리를 하시는데, 그게 진통제 부작용인지 뇌전이인지 감별이 안된다. 뇌 MRI 를 찍는게 맞는 것인지, 뇌전이가 맞으면 방사선치료를 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연세가 아주아주 많으신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치료는 교과서적으로 진행되기 어려운 것 같다. 아무리 평소 컨디션이 좋으셨다 하더라도 병의 진행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각종 검사나 치료의 영향에도 예민하다. 검사도 무리하면 안되고, 약도 조금만 소홀하게 쓰면 즉각 반응이 온다. 연세가 많으신 왕왕 할머니들 할아버지는 살만큼 살았으니 검사고 치료고 다 귀찮다며, 빨리 죽는게 낫다며,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물론 불편한 곳을 해결해드리고, 아프지 않게 해드리면 고마워하시지만, 기본적으로 검사나 치료를 받고 싶어하지 않으신다. 피검사만 해도 짜증내신다. 당신이 아파서 누워있는거 자체가 자식들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하신다. 이들의 기본적인 무드는 우울인것 같다.
오랫동안 아픈데 참고 지내서 병원에 오신 탓인지 전체적으로 기운이 없다. 코티졸 검사를 해보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거의 없다. 그래서 생리학적 용량으로 스테로이드를 조금만 드려도 기운을 차리신다. 아파서 꼼짝 못하고 누워계시다가 방사선치료를 하고 통증이 좋아지니 기분도 조금씩 좋아지시는 것 같다. 매일 누워만 지내시던 할아버지가 세달만에 처음으로 걷기 운동을 시작하였다. 나와 약속을 하고 병동을 10바퀴씩 운동을 하고 계신다. 
방사선치료만 하는 환자는 왠만하면 퇴원하여 통원치료를 받게 하지만 이들 왕왕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왔다갔다 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방사선치료 중인 두분은 그냥 입원해 계신다. 병원측에서는 매일 재원일수 평균을 내서 불필요한 입원일수를 줄이도록 압력을 넣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너무 연세가 많으셔서 활동이 자유롭지 않으니 10번 방사선치료를 다 받고 퇴원시킬 예정이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하시지만
통증이 조절되고
불편감이 완화되고
기운이 좀 나고
못 드시던 음식을 먹게 되니
얼어붙었던 왕왕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다.
방사선치료의 효과가 소실되면 2-3개월안에 더 많이 나빠지실 가능성이 많으신 분들이다. 돌아가실 날이 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만이라도 회복되는 경험, 그렇게 얻어진 시간이 이들에게 후회없는 삶의 한 순간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치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