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 993

그녀의 힘

허리가 아파서 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병원에 왔다. 유방암간, 폐, 전신 뼈, 골수, 림프절 전이 이런 무시무시한 병들이 그녀의 진단명이 되었다. 척추 전이 때문에 그렇게 아프고 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항암치료에 앞서 통증 조절을 위해 방사선치료를 먼저 해야 했다. 이미 골절이 온 부위, 곧 골절이 되어 신경을 누를 것 같은 부위, 급한 대로 그런 부위에 방사선 치료를 시작했다. 피검사를 하면 남들 백혈구, 적혈수, 혈소판의 반도 안되는 수치였다. 항암치료를 하면 대개 이런 조혈기능을 하는 세포들이 파괴되어 수치가 떨어지게 되는데 그녀는 지금보다 더 떨어지면 아주 위험한 상황이 초래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골수에 병이 있는 한 그런 수치들은 절대 좋아질 수 없다.척추에 방사선 치료를 받은지 얼마 되..

그만하면 살만한 거에요

유방암 수술 후 항암치료가 끝나고 방사선치료도 끝난 지 2년이 넘었다. 지금은 항호르몬제를 드시면서 6개월에 한번씩 정기 검진만 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사실 그녀는 이제 종양내과 환자가 아니다. 그녀는 오른쪽 폐 아래 쪽에 기관지 확장증이 있다.그래서 감기 등 호흡기 질환이 찾아 오면 가래에 피도 섞여 나오고 숨이 차고 호흡이 편치 않다.처음 그녀의 가슴 엑스레이를 보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정상 폐사진과 비교해서 보면 상당히 나쁘다. 빨리 CT라도 찍어서 속 안을 좀 들여다 봐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드는 사진이다. 그녀는 유방암 치료를 다 마치고 저 멀리 남쪽, 당신 고향으로 내려가셨는데별로 심각하지 않은 증상이 생겨도 환자는 항상 화들짝 놀라하며 서울행이다. 그 먼 곳에서 걸핏하면 응급실..

환자가 경험하는 질병 세계를 이해하기

의사는 객관적인 지표에 의해 환자의 병 상태를 진단하고 평가한다.환자는 주관적인 경험으로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고 경험한다. 객관적인 상황과 주관적인 상황이 잘 들어맞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의사가 보기에는 특별한 문제가 아닌데환자는 아주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의사가 보기에 별거 아닌거 같은데 환자가 이것저것 힘들어하고 불편해 하면의사는 자신의 인식체계 내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경우 또한 심기가 불편해 진다.그것이 의사와 환자 사이의 거리를 멀어지게 하고 이들간 의사소통이 원할하지 않게 되는 원인이 된다.때론 의사의 부주의와 무관심 때문일 수도 있고때론 환자의 과민한 반응과 과도한 걱정 때문일 수도 있다. 환자가 경험하는 질병의 세계는의사의 인식체계와 언어로는 이해할 수 ..

암생존자의 후기합병증 관리

암 생존자의 후기 합병증 관리 2012년 12월에 발표된 국가암등록 통계자료에 의하면 2010년 현재 한국의 암생존자가 100만명을 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암 생존자 그룹이 증가하고 이들의 수명이 증가함에 따라 암 치료 후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과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암 치료 중 발생한 부작용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을 장기적 합병증(long term effects) 이라고 한다면, 치료 기간에는 발생하지 않았으나 치료가 끝난 후 새롭게 발생한 증상을 후기 합병증 (late effects)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1) 후기 합병증은 암 치료를 위해 받았던 항암치료, 방사선치료, 수술 등과 관련하여 사람마다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날 수 있다. 신체적 심리적 합병증도 다르게 표현된다. 암 ..

아흔이 넘은 우리 엄마도 정정하신데

전이성 유방암을 진단받으신 62세 여자 환자. 최초 항암치료에 반응이 아주 좋았는데 어느 순간 저항성이 생겼는지 다시 유방의 혹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원칙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전이성 유방암임에도 불구하고 유방에 대한 수술을 하셨다. 여전히 뼈에 병이 남아있지만 그만그만하게 병이 잘 조절되고 있다. 그렇게 지내신지 어언 1년이 지나가고 있다. 이 사람이 너무 무리하는 거 같아요. 함께 외래에 다니시는 남편이 걱정어린 한마디 말씀을 하신다. 제가 암환자인지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아요. 그게 좋은 거에요. 계속 그렇게 사세요. 근데 혈당이 좀 높은 거 같아요. 혈당 조절 잘 하시는게 좋아요. 우리 병을 조절하는 데에도 혈당조절이 중요해요. 요즘 들어 소화가 잘 안되는거 같아요. 아흔이 넘은 우리 엄마보다 소화..

상호적인 마음

내가 누군가를 불편해 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는 단박에 그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겉으로 안그런 척 해도 금방 알아 차립니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는 은연중에 그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겉으로 표시내지 않아도 그 마음을 알아 줍니다. 상대방에 대한 나의 마음은 어느샌가 그 사람을 향한 나의 태도로 표시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너 예뻐보인다, 좋은 일있니? 사랑에 빠진거야?' 그런 말을 들은 적이 한번 있습니다. 그건 (결혼할 무렵이 아니라) (의대 다니기 전) 대학교 4학년 때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 였습니다. 철부지 고등학생 녀석들이랑 정말 친하게 지냈죠. 그 녀석들은 정말 시도때도 없이 '교생선생님, 사랑해요. 선생님, 너무 좋아요' 그런 말을 저에게 해 주었습니다. 교생..

환자들의 마음을 느끼며

진심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고 무슨 일에 대해 기뻐하고 누군가를 위해 슬퍼하는 마음의 울림이 점점 줄어든다. 나이를 먹어서 심장의 감정수용체들이 다 닳아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변명한다. 암환자를 보는 의사는 감정조절도 잘 해야 한다고 한다. 환자를 보면서 너무 기뻐하거나 너무 슬퍼하지 않도록 스스로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들 한다. 백프로 동의한다. 감정이 스며들고 마음이 젖으면 너무 힘들어서 다른 환자 보는데도 지장이 있고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기도 한다. 나이를 먹었으니 직업이 직업인만큼 마음이 점점 메말라간다. 메말라가기 쉽다. 그렇지만 아직은 일상의 다른 일에는 무관심해 지면서도 환자를 볼 때는 마음이 출렁거리는 것을 느낀다. 어쩔 수 없이 감정이 섞인다. 내가 비록 최고의 의사는 아니지만..

222, 왠지 일기쓰고 반성해야 할 것 같은 날이다

내가 최선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닐 때가 있다. 나 스스로는 잘 한다고 한 것인데 지나고 보면 별 것 아닌 걸 가지고 내가 폼 잡은 거라는 걸 알게 된다. 최선을 다하기 위해 너무 많은 애를 썼는데 지나고 보면 심지어 잘못된/잘못한 일일 때도 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는게 두렵다. 누가 봐도, 어느 때 봐도, 흠 안잡히는 방향으로 최소한만 하고 사는게 어떨까? 가늘고 길게 저공비행을 하면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 그리고 힘을 분출해야 할 때 응집력을 낼 수 있다. 그래서 평소에 매일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삶이 효율적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아쉬울 때만 누나라고, 더 아쉬울 땐 엄마라고 날 불러도 밉지 않은 레지던트 동기랑 어제 통화를 하는데, 그는 내가 변한 것 같다며 새삼..

나 너무 좋아한 걸까?

진료실 들어서는 그녀 얼굴 표정이 환하다. 몇개월 전 마음의 고통이 온데 간데 없어 보인다. 이번에 찍은 사진 결과도 좋다. 뼈전이가 있기는 하지만 병변이 별로 넓지 않고 안정적으로 유지되기를 몇년째. 안색이 좋으시네요. 피부도 좋아졌어요. ㅎㅎ 나의 추임새 한방에 그녀가 입을 연다. 우리 딸이 이번에 한림대 의대 갔어요. 그녀가 겪었던 지난 몇개월 간의 마음의 고통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하나뿐인 그녀의 딸이 대학입학, 그것도 의대에 갔다는 사실에 너무나 기뻤다. 의대라서 그런거냐 속물적이라 비난해도 나는 너무 기뻤다. 거봐요. 그때 괜히 고민한거 였잖아요. 할 놈은 다 해요. 부모가 필요없어요. 괜한 잔소리에 불과한 거에요. 그러게요. 지가 다 알아서 하고 있었나봐요. 학원도 별로 못 보내줬는데... ..

미나리와 계란

환경 오염이 덜 된 유기농 음식, 깨끗하게 준비한 음식, 정성껏 만든 음식. 아줌마 환자들이 자신을 위해 일상적으로 노력하는 것들이다. 당신이 먹어보니 맛도 깔끔하고 염분도 낮은 것 같다며 소금을 사다 주기도 하고 동네 뒷산에서 주었다며 밤을 쪄다 주시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맛있는 밤은 처음이라고 하니 옆집 창고까지 뒤져서 밤을 더 삶아다 주신다. 당신 집에서 키우는 닭이 낳은 거라며 꾸러미 달걀을 갖다 주신다. 세줄 삽십알. 마트에서 파는 그런 달걀보다 훨씬 속이 알차고 튼실하다. 멀리 대구 사시는 분, 미나리 한박스를 손수 가지고 오신다. 벌써 세번째다. 뇌전이 방사선 치료 이후 걸음걸이가 아직 완천치 않은데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게 이 무거운 짐을 가지고 서울 오는 기차를 타신다. 내가 마음으로 늘 ..